프랑스 항쟁은 지금 노동자와 학생들의 투쟁으로 발전해 있다. 그러나 사르코지도 긴축 때문에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결국 법안이 통과되면 운동은 정권 자체에 도전하려는 쪽과 사기가 꺾여 주춤하는 쪽으로 나뉠 수 있다. 마치 2008년 촛불항쟁 때 미국산 쇠고기 수입 고시가 발표된 뒤에 그랬듯이 말이다. 

그러나 지금 판돈은 그 이상이다. 노령연금 축소로 촉발된 투쟁이 세대를 아우른 노동계급의 항쟁으로 발전한 것은 지금 쌓인 불만의 크기와 투지를 보여 준다. 

프랑스 노동계급은 이번 총파업 투쟁을 통해 싸울 수 있는 힘이 충분하다는 것도 보여 줬다. 이전에도 이들은 1995년 반신자유주의의 전환점이던 공공부문 총파업(‘붉은 겨울’) 때부터 최근 유럽헌법 부결과 CPE 폐기까지 상당한 승리의 경험을 축적해 왔다.   

운동이 갈림길에 설 때, 늘 중요한 것은 단호하게 투쟁을 계속 이어가도록 지도력을 발휘할 잘 준비되고 응집력 있는 집단의 구실이다. 

이 투쟁의 결말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이 투쟁이 한국에 주는 교훈은 정부와 기업주들이 경제 위기의 책임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전가하려 할 때, 가장 좋은 대응은 모여서 행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투쟁해도 소용 없지 않냐고? 그럼 투쟁해도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자들이 입 닥치고 있으면 우리 요구를 들어주겠나??? 침묵하면, 백 퍼센트 우리가 고통을 책임져야 한다. 투쟁하면 최소한 반반의 가능성은 생긴다. 

올해 그리스와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의 거대한 투쟁들은 바로 이 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투쟁하는 곳에서, 그것도 수백만 명이 한데 모여서 투쟁하는 곳엔 적어도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경제 위기에 책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고통을 나눠 가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래는 프랑스 반자본주의신당(NPA)가 올린 총파업 행진 동영상.(그 아래는 <레프트21> 번역 기사)

 


프랑스에서 연금 공격에 맞선 반격이 거대한 저항으로 발전했다.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의 연금 기여분을 늘리고 67세까지 일해야 연금 전액을 받을 수 있게 개악하려는 사르코지 대통령의 계획에 맞서 싸우고 있다.

사르코지 대통령의 계획은 경제 위기의 대가를 부자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치르게 하려는 부자들의 의도를 잘 보여 주는 것이다.

화요일[10월 19일] 현재 대중 파업, 시위, 학생 반란은 최고조에 달해 있다.

프랑스의 정유소 12 곳이 모두 무기한 파업에 동참하면서 연료 부족 사태가 나라 전체로 번지고 있다. 프랑스 전체 1만 2천6백여 곳의 주유소 가운데 약 2천7백 곳에서 석유가 완전히 동났다.

캉, 라이시쉬테트, 덩커크, 생피에르데코의 석유 저장소 봉쇄도 계속됐다.

화물차 운전사들도 파업에 들어갔고, 주요 도로에서 거북이 운행을 하는 ‘달팽이 작전’을 펼쳤다.

프랑스 전체 4천3백여 곳의 중고등학교 가운데 거의 1천여 곳이 휴교했고, 그 가운데 6백 곳은 봉쇄됐다. 몇몇 지역에서는 고등학생들이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 공격에 맞섰다.

이와 같은 노동자와 학생 들의 반란은 긴축 공세를 중단시킬 힘이 있으며, 반란이 지닌 잠재력을 십분 활용하면 승리할 수 있다. 

기사 더 보기 ☞ 노동자와 대중의 힘을 보여 주는 프랑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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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자본주의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좀더 능동적 관점으로 질문을 바꿔 보자. 자본주의를 없애고 난 폐허 위에 어떤 세상을 만들려는가. 아니, 만들 수 있는가?

대안 사회 논의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자칫 현실과 유리된 유토피아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것은 창조적 에너지의 창고가 되기도 하지만, 현실의 비루함이 오래될수록 우리 안의 독이 된다. 

대안 사회는 현실에서 생겨날 것이다. 바로 그 폐허 위에서, 바로 그 탐욕의 철로 끝에서.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이 만들어 놓은 조건에서 대안 사회의 가능성과 대안 사회의 원리들을 도출해 낸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발달한 생산력과 그 생산력을 담지하는 집단인 노동자계급의 존재가 계급사회 발생 이후로 최초로 사회주의[각주:1] 사회의 가능성을 현실화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최초로 모든 이들이 먹고 살 만한 부를 창조했다. 그 과정에서 비도덕성과 비민주성, 불평등이 만연했지만 말이다.

이전 사회와 달리 자본주의에서 생기는 빈곤은 사회의 부(총생산)가 인구와 비교해 적어서가 아니라 넘쳐서 생긴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자본주의에서는 사회 전체의 생산능력과 부가 오직 개별 경제주체들(기업과 개인 등)의 소비 능력에 따라
분배되기 때문이다.

생산력의 발전을 반영해 자본주의 핵심 생산단위인 기업은 이제 소수 개인들 소유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주식회사의 등장은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의 개인 소유 원리를 부정하는 현상이다.

이런 경제 조건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계급은 이전 다른 모든 피착취 계급과 달리 집단적 생산에 종사한다. 그들은 고도로 집중화된 생산시설을 이용해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한다.

그들이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생산수단을 각자 나눠 갖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통제하는 길이다. 농민을 되찾은 토지를 나눠 가질 수 있지만,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이 공장을 나눠 가질 순 없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의 생산은 이론상 사회의 [필요에 따른] 총수요와 아무 관계 없이 생산되며, 그 생산과 수요의 적절한 비율은 사후적으로만 평가된다. 이 경쟁적(=시장쟁탈적) 생산의 보편화는 필연적으로 과잉생산의 경향을 낳는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두 가지 분리에 바탕했기 때문인데, 하나는 직접생산자와 생산자의 분리이고, 하나는 생산이 경쟁하는 자본들로 분리돼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전자는 임노동-자본의 관계를 낳고, 후자는 무계획적 시장 경쟁을 낳는다.

그 점에서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은 유용한 시도다. 그것은 상상력을 자극하면서도 생산과 소비의 계획 등 미래 청사진의 구체적 형상을 현재 자본주의 방식과 대비해 설명한다.

그는 평등과 연대, 다양성, 자율관리 등의 가치를 제시한다. 임노동-자본 관계가 낳는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려고 사람들의 노동이 세심하게 고려된 균형적 직군으로 편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장경제가 사람들의 필요보다는 잘 팔릴 상품을 중심으로 생산하는 모순을 바꾸려면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생산계획과 소비계획이 경제 전체의 윤곽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합리적이며 구체적으로 잘 짜여진 그의 파레콘(참여경제) 계획은 유토피아적이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한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선 내게는 전반적인 계획에서 앨버트와 다르게 생각하는 점도 있다. 꼼꼼하게 그의 저작을 살펴볼수록 그 차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인 듯하다.

내가 보기에 앨버트는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인 계획경제 구상이 필연적으로 스탈린주의식 관료지령경제로 귀결된다고 보는 듯하다.

그는 한 챕터를 할애해 중장집권계획경제를 비판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경영을 담당하는 조정자계급을 낳게 될 것이고, 이는 계급 체제를 부활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와 레닌은 물론이고 스탈린과 대척점에 섰던 트로츠키마저 그 전략과 전략 주체인 당이 스스로 조정자계급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마르크스주의=중앙집권계획경제=스탈린주의=관료적계급체제=조정자계급지배경제인 셈이다.

문제는 계획경제라는 사상과 실천의 역사에 관한 그의 평가가 그의 파레콘 계획에 반영된다는 점이다.

그는 노동자평의회가 생산계획을 짜고, 지역의 소비자평의회가 소비계획을 짜서 반복 조절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평의회의 기초 단위는 개별 공장과 카운티(한국으로 치면 군 단위라고 함)라는 것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이를 두고 지나치게 시장경제와 가까운 의사결정 방식이 아니냐는 비판을 한다. 중장기적 계획이 필요한 문제를 해결할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다. 캘리니코스는 이 점에서 드바인의 ‘협상조절모델’이 더 효과적이라고 평한다.

나도 캘리니코스의 견해에 동조하는데, 계획은 아래에서 위로 취합해 가는 계획도 필요하지만, 위에서 아래로 생산과 소비를 계획적으로 조절하고 배분하는 일도 필요하다.

우선, 사회 전체의 부가 흘러 넘친다 해도 자연적 총량은 한계가 있다. 생산과 소비에 관한 계획이 각 자율적 단위의 계획들을 취합하고 사후적으로 조절하는 과정만으로는 지속적 해결 방식이 될 수 없다.

생산과 소비 수요의 충돌 문제도 볼 수 있다. 이른바 남반구 국가들의 농업 문제(식량 위기)
는 지금의 식량 소비 구조를 바꿔야 하는 압력이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소비 계획을 자율적 단위들에게만 맡겨 두고 캠페인 식으로 해결할 순 없다[각주:2].

게다가 특정 사안들은 사회 전체 차원의 결정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에너지 전환을 한다고 하면, 기존의 핵에너지와 화석에너지[각주:3] 발전(전력 공급)을 없애는 것부터 시작할지 아니면(수요를 당분간 억제해야 한다), 기존 수요를 고정한 채 자연력 에너지 공급을 늘리는 과정부터 시작할지 결정해야 한다.

이것은 자율적 단위들의 사후적 조절 메카니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게다가,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더라도 일정 기간 동안 모든 경제 단위들이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하는 시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생산과 소비 모두 제약이 생긴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앨버트의 계획은 기본적으로 우선적인 중앙 계획을 따라서 권위를 지닌 중앙 계획 기구를 거부하는 것이다.
각 촉진위원회는 순전히 계획을 짜고 집행하는 데서 기술적 구실에 한정돼 있다. 이것은 시장경제를 ‘무엇인가’로 대체하려는 핵심적 이유를 거부하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부정적 본질 가운데 핵심이 ‘무계획성’이다[각주:4]

그 점에서 앨버트가 단위 공장과 군 단위를 기초 평의회 단위로 설정한 것도 시사적이다. 앨버트의 파레콘 작동 방식은 기본적으로 공장과 군 단위의 노동자/소비자평의회가 서로 계획들을 내놓고 반복되는 검증 과정을 거쳐 사후적으로 생산과 소비를 조절하는 과정이다.

앨버트의 파레콘 계획이 시장경제의 작동방식과 닮아있다는 비판은 바로 이런 뜻이다. 협력적이란 뜻에서 사회적 생산이 이뤄지는 체제에서 총생산(=총소비) 단위의 배분 계획과 그 계획을 수립할 민주적 기구와 작동원리가 없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한 난점들을 해결하고 파레콘의 약점을 극복하려면, 중앙 차원의 계획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스탈린주의식 가짜 계획경제=관료적 지령경제와 다른 민주적이고 참여를 보장하면서도 중앙집중적인 계획 메카니즘을 구성해야 한다. 

각 지역과 작업장의 민중의회들과 평의회들이 보낸 대표들로 구성되고, 이들에게서 수렴된 의사들을 집행할 대표기구이자 하급 평의회들에게 사회 전체의 필요와 조건을 판단해 결정한 계획을 지시하고 집행할 민주적 중앙계획기구가 필수적이다. 

내가 볼 땐, 파레콘의 자율적 단위들을 유지하면서도 위계적이지 않은 중앙집중적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체계가 가능해야만 자본주의 시장경제보다 민주성과 효율성 면에서 우월한 경제를 이룰 수 있다. 이 점이 마르크스주의의 민주적 계획경제론이 자본주의에 대해 가지는 본질적 장점이다.

쟁점은 그것이 어떻게 (실제로는 비계획적인) 스탈린 식 지령경제와 다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어떤 특권도 없고, 아래로부터 선출되며, 언제든지 소환 가능한 이행기 단계의 국가를 전망했다. 이것은 단지 예측만이 아니라 목표다. 마르크스는 이 원리를 1871년 파리 코뮌에서 배웠고, 역사는 20세기 동안 줄곧 이 목표가 현실화한 사례들을 남겨줬다. 

이 평의회 국가는 과거의 흔적 위에서 과거를 일소하면서 사회 전반의 계획이 작동하는 방식을 그 세대의 상상력으로 실현할 것이다. 이 국가야말로 국가와 정치를 계급 지배 도구와 권력 투쟁에서 순전히 경제적이고 행정적인 문제로 바꿔 놓는 구실을 하면서 소멸해 갈 것이다. 관료제를 막으려는 계획기구 요원들의 추첨제도 이런 사회 단계에서는 민주적일 수 있다고 본다. 

앨버트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혐오(우리도 공유하는 정당한 혐오) 때문에 이 과정마저 거부한다. 그래서 앨버트의 파레콘은 어떻게 이 참여경제가 현실에서 시장경제의 작동을 멈추고 현실에 안착해서 작동 가능한가 하는 근본적 물음을 남긴다.

그러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대안 사회 구상인 민주적 참여계획경제는 기존 국가기구를 대체하는 이행기 국가 단계를 전망하기 때문에 자본의 최후 방어막인 국가기구를 타도할 집중적 행동 전략을 제시한다. 이 전략의 핵심 주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목표인 이윤 생산을 생산 과정에서 담당하는 노동자계급이다.

노동자계급과 이들을 따르는 다수의 피억압 대중들은 투쟁 과정에서 스스로 사고와 실천을 혁신할 것이다. 체제를 바꾸는 행동은 그 체제에 물든 주체들을 혁신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전략적 투쟁의 힘만이 자본가들을 권력의 원천에서 무력화할 수 있다. 그 힘으로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정치적 지배자로 등장해야 한다는걸 뜻한다.

그것은 역사상 최초로 소수가 아니라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체제가 될 것이며, 근원적인 불평등 구조가 해소되는 순간, 앨버트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노동자국가조차 필요 없게 될 것이다.

□ 참고 도서
저자: 마이클 앨버트

출판사: 북로드
출판년도: 2003년

출판사 서평: http://www.yes24.com/24/goods/392270?scode=032&srank=1

<레프트21> 서평: http://www.left21.com/article/1102



저자: 알렉스 캘리니코스/마이클 앨버트

출판사: 책갈피

출판년도: 2009년

출판사 서평: http://www.left21.com/article/6839




  1. 마르크스 이전에도 사회주의라 부를만 한 사상과 운동은 존재했고, 그 역사는 매우 길다. 《사회주의의 두 가지 전통》(칼 드레이퍼, 다함께, 2003) 참조 바람. [본문으로]
  2. 소농 중심의 지역 자급 농업을 중심에 둘 지, 집단 농장 형태를 중심에 둘 지도 고민거리다. [본문으로]
  3. 핵에너지도 그렇지만, 지구 온난화 때문에 화석에너지 사용 중단도 시급한 과제다. [본문으로]
  4. 시장경제는 본질적으로 무계획적이고, 반민주적이며, 불평등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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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 기사: 윤리적 소비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관련 글: 착한 소비의 딜레마 ― 마르크스주의 관점  / 신세계·이마트와 정용진의 이념적 소비
(이 글은 부족하지만 위 글의 보론 성격으로 쓴 글입니다. 함께 읽어주세요~)

1.
오늘날 윤리적 소비, 즉 착한 소비 운동은  “소비는 돈으로 하는 투표”나 “돈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표어를 내세웁니다. 

그래서 그것은 단지 소비자운동만은 아닙니다. 사회구조와 관련해 매우 포괄적인 주제들을 다룹니다. 

소비로 기업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고, 사회 책임 투자를 촉구하는 운동이나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는 것으로 발전합니다. 

선진 제국과 다국적 기업의 수탈적 무역에 대한 반대가 공정무역으로, 선진국 은행에 저축한 돈이 비윤리적으로 쓰이는 것에 반대하려는 생각이 지역 화폐나 비영리은행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은행들에게 하는 저축이 이 은행들의 미국 채권 투자를 통해 미국의 전비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중국, 대만, 한국 등과 더불어 미국에 대한 채권 국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윤리적 소비운동은 참여하기도 쉽고, 의미도 가지는 운동으로 비춰지는 듯합니다. 저도 가능한 영역에서는 윤리적 소비를 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윤리적 소비가 목표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2.
우선, 불매 운동과 윤리적 소비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사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친환경 제품을 사자는 것은 반환경 제품을 사지 않겠다는 의지를 대안적 소비 형태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폭넓은 방식인 불매운동은 대체로 윤리적 소비운동의 가장 초보적인 방식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가장 높은 수준의 윤리적 소비운동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최근 몇 년 새 한국타이어[각주:1]와 이랜드, 조선일보 광고기업리스트, 미국산 쇠고기 취급 대형 마트 등 다양한 불매운동의 사례가 있습니다.  며칠 전엔 ‘삼성’과 정면 대결하자는 분들이 ‘삼성불매운동’을 제안하는 《굿바이삼성》이라는 책을 냈다는데, 이것도 한 사례입니다.

윤리적 소비가 불매운동이라는 초보 방법으로 되돌아 간 것은 삼성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삼성을 대체할 수 있는 기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보험, 화재보험, 가전제품, 핸드폰, 컴퓨터 등 삼성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삼성의 경쟁기업들은 삼성보다 작아서 악행의 규모가 더 작은 기업들 뿐입니다.

무노조 삼성이 싫다고 노조 탄압 LG 제품을 사야 하나? 윤리적 소비를 일상에서 실천하려는 많은 분들이 고민했을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윤리적 소비운동이 부딪치는 가장 딜레마이자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는 가장 나쁜 기업을 윤리적 소비의 어떤 방법으로도 혼내 주기 힘들다는 것이죠.

자본주의 시장에서 독과점, 즉 집적[각주:2]과 집중[각주:3]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정용진 때문에 쟁점인 유통업계를 예로 들면, 대기업 유통 마트 진입에 반대하는 동네 슈퍼들도 이전에 자신들끼리 이런 과정을 거치곤 했습니다. 지금 대형마트 반대자들은 이전 경쟁의 생존자들인 거죠.

이것은 이론상으로도 경험상으로도 이미 확인된 내용입니다. 대기업조차도 이를 피할 순 없습니다. 다국적 기업인 월마트, 까르푸가 실패해 떠났고 이랜드도 실패해 삼성에 넘겼습니다. 이 경쟁은 국가를 동원하기도 합니다. 양쪽 모두 공정거래위와 국회를 동원합니다. 

이런 시장의 특성상 이마트가 싫어 다른 대안 유통업체를 찾아 봐도 나쁜 기업을 만나는 걸 피하기 힘듭니다. 그것은 다른 소비재 시장도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3.
그래서 윤리적 소비 운동은 대안적 소비 운동으로 나가자는 분도 있습니다. 대체로 우리에게 소비를 강요하는 대기업들의 소비 품목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 생활에 본질적으로 필요한 물품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자동차, 대형TV, 핸드폰, 보험상품, 주식투자, 비행기 여행, 패스트푸드 등.

안타깝게도 이것은 사회의 다수인 노동 대중들의 삶과 유리된 소비 생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핸드폰 안 쓰겠다는 사람을 누가 고용하려 하겠으며, 오늘날 컴퓨터와 TV 등을 통한 매스미디어를 접촉하지 않고서 취업과 업무에 필요한 업무 지식을 습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가용의 경우도 쓰지 않을 수 있지만, 콩나물 시루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너무 힘든 건 사실입니다. 패스트푸드 형태로 육식을 섭취하는 건 바쁜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불가피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화재보험 없인 자가용을 굴릴 수 없고 체제가 생존을 책임져 주지 않으므로 생명보험이나 연금보험이라도 들어놔야 안심이 됩니다.

그래서 대안적 소비 운동은 근본주의적인 자급자족 소농 공동체운동으로 발전하거나 아니면 나쁜기업에 대한 생필품 의존을 인정하고, 커피나 초콜릿 같은 기호품 소비에서 윤리를 찾는 온건한 형태에 머물게 됩니다.
 

이런 기호품 소비는 시장이 작아 대기업들을 변화시키는 데 매우 부족한 상품들입니다. 

게다가 커피, 바나나, 초콜릿, 차 등의 기호품 소비는
선진국에서 20세기 들어서 대중적 유행이 됐는데, 이 작물들의 역사는 예전 남미와 아프리카의 플랜테이션 노예농장과 연관이 있습니다. 풍족한 농업지대가 식민본국의 기호품 소비를 위한 단일경작 노예농장으로 바뀌는 겁니다. 

20세기 중반부터 선진국들은 가난한 나라에 돈을 꿔 주고 엄청난 고금리로 이 돈을 갚도록 합니다. 외채의 덫에 걸린 가난한 나라들은 자국의 식량 공급을 파괴하면서까지 선진국 시장에서 돈 되는 작물의 단일 경작으로 농업 구조를 바꿔야 합니다. 공정무역이 취급하는 기호품들이 대체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식민지 시대부터 형식적 독립국인 지금까지 이 지역들은 만성적인 식량위기 상태입니다. (참조 ☞ 여기) 공정무역기업과 거래하는 제3세계 농민들은 거대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이 아니라 소농들입니다. 거대 커피농장 자체를 네슬레 같은 다국적 기업들이 경영하니까요. 

단일경작 수출은 농업 위기를 낳고, 변덕스런 국제 식량시장에 해당 지역 농민과 노동대중의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지금 커피의 경우 과잉 공급이 낮은 산지 가격의 주요 배경입니다[각주:4]. 근본에서 이런 수출의존, 수출용 단일경작체제를 바꾸지 않도록 하는 공정무역이 과연 정말 선한 것이라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긴 합니다.

다국적 기업들보다는 더 많은 가격을 쳐 주니 상대적으로 훨씬 더 윤리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상대적 고비용은 기업 이윤을 감소시키는 게 아니라 소비자가 부담합니다. 시장 관계로 만나는 것이므로 이것이 진정으로 연대의 가치를 실현하는 관계인지는 의문입니다. 공정무역 시장이 커지면 자본력이 약한 공정기업들을 밀어내고 대기업들이 시장을 나눠 가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정무역도 세계 무역의 진정한 불공정 구조를 바꿀 수는 없다고 결론 내닐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수탈적인 세계무역구조를 미화시키기도 합니다. 

결국 대안적 소비 운동은 대기업의 시장 과점과 시장 구조 자체의 비민주성과 불공정성 때문에 현대 자본주의 다수 대중의 대안적 삶의 형태가 되기에 부족합니다. 소비 운동이 중산층 운동처럼 보이는 이유죠.  

생협과 로컬푸드 등도 대안적 소비라 할 수 있는데, 식품 안전이란 면에서 윤리적일 수 있고, 한국처럼 자영농이 많은 구조에서는 양쪽에 모두 이득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더 비용이 더 들고, 생산의 질을 유지하려면 보편화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구조는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상을 바꾸는 소비는 되질 못합니다. 

이런 점들은 윤리적 소비가 생산자에 대한 자선 효과를 노리는 것인지, 개인 소비의 질 향상을 기대하는 것인지 모호하게 만듭니다. 

다른 한편, 바로 이 점이 소비(취향과 능력)가 생산(규율과 소득)에 매여 있는 또다른 증거이기도 합니다.

△ 공정무역 매출은 매년 늘고 있다. 공정무역 시장이 커지면 공정무역마크를 단 대기업 상품들을 보게 될 것이다. 기업으로선 손해보는 건 아니다. 공정가격을 산지에서 지불한 만큼 판매가격을 올려 받기 때문이다.



4.
자본주의에서 기업 이윤(잉여가치)은 판매차익이 아니라 “출입구에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팻말이 붙어있는,가려져 있는 생산의 장소”(마르크스)에서생겨납니다.

이 곳에서 자본가들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에게 약속한 대가(임금)보다 더 많은 노동(잉여노동)을 부과합니다. 이 잉여노동의 결과로 생겨난 추가적인 재화와 서비스가 잉여가치인데, 자본은 이를 이윤이라고 부릅니다.


즉, 전체 생산과정에 투자된 자본 가운데 원료는 그대로 생산품의 가치에 이전되며, 기계도 감가상각되어 생산품 가치에 이전됩니다. 노동만 유일하게 자신의 가치(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착취’입니다. 즉, 마르크스주의에서 착취는 부당거래로 만든 차익이나 수탈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경제주체의 소득은 이처럼 노동자 착취에 바탕한 생산과정에 기여한 몫을 그 비율 만큼 배분받는 것입니다.

노동력 제공, 공장과 창고 등 토지의 대여, 현금 대출, 법과 경찰로 기업을 보호하는 국가, 생산품 판매와 배송, 노동력의 교육과 치료 등이 임금과 지대, 이자, 세금, 수수료 등으로 실제 이윤이 나는 생산 영역에서 노동자와 나머지 자본, 그리고 국가에 배분됩니다.

나머지 자본과 국가가 가져가는 몫의 노동은 실제로 이 부문에 고용된 노동자들이 했으므로 이 노동자들은 이 배분되는 몫에서 임금을 받습니다. 이 노동자들도 잉여노동을 한 것이므로 착취를 받습니다.

결국, 이 소득 배분 과정은 잉여가치 생산과 실현, 배분 과정에서 구성된 자본의 연결망이 노동자들 전체를 착취하는 것, 즉 집합적 착취 관계의 형성을 보여줍니다. (한편에선 화폐 물신주의, 즉 화폐가 신비한 구매력을 가지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이마트의 힘은 싼 판매가격이 아니라 싼 구매비용에 있다는 겁니다. 싼 판매가격은 시장 점유율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싼 판매가격으로 시장을 과점해도 이윤을 남기려면 투자와 산출(매출)을 대비해 후자의 비율이 높아야 합니다. (이는 자본주의 시장경쟁의 본질이 단순한 유통과 판매가 아니라 경쟁적 축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판매노동자를 저임금에 쓰고, 현금과 유통망의 힘으로 생산기업들을 압박해 더 높은 착취강도로 더 싸게 물건을 공급하도록 만들 수 있는 힘[각주:5]입니다.

이것이 대형유통자본에겐 있고, 동네 중소 상인에겐 없는, 대기업이 영세상인들을 몰락시키는 힘입니다. 그래서 대기업은 사는 물건부터 사는 장소까지 우리가 자신을 피할 수 없도록 포위합니다.

한편, 중소기업도 생산비용을 낮출 수만 있다면 대체로 대형유통마트에 납품하는 게 매출을 늘릴 수 있으므로 이득이 됩니다. 소상인들도 경쟁하려면 구매비용을 낮추는 데 같은 이해관계를 가집니다. 더 싼 상품 공급을 바라는 거죠. 서로 싸우는 듯 보이는 대기업-중소기업-유통기업-중소상인이 한편에선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는 이유입니다. 

이 가운데 소비재를 취급하는 소상인들은 대기업과 싸우면서도 노동자투쟁은 환영하지 않고, 생산기업 노동자의 임금 인상은 바라지 않으면서 소비자로서 노동자의 임금 인상은 바랍니다. 중간계급의 모순된 처지란 바로 이런 겁니다[각주:6].



5.
이 얘기를 장황하게 한 또다른 이유는 소비가 기업 이윤에 타격을 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첫째, 노동자들의 전체 소득을 합해도 전체 생산 몫의 일부이므로 소비재 수요가 기업 이윤에 타격을 주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둘째, 소득의 원천이 기업들의 이윤 생산 과정이므로 앞서 지적했듯이 소비행태 등 생활방식도 생산과 결부된 필요와 문화에 대체로 종속됩니다.

셋째,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누구를 윤리적 소비의 파트너로 택하더라도 경제의 근본 구조는 전혀 손상되지 않습니다.

넷째 이 점도 매우 중요한데, 자본주의 경제에서 진정한 소비자는 생산과정에서 온갖 생산요소와 제반서비스를 구매하는 생산자본이라는 겁니다[각주:7].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투자가 수요를 창출하는 원리입니다.

좀더 부가하면, 바로 이런 자본주의 투자의 성격 때문에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계급의 소비능력이 자본주의 전체의 생산물보다 적은데도, 심지어 농민 등을 다 합쳐도 총투자액이나 총산출물에는 못 미치게 돼 있는데도 일반적으로 과소소비 공황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나면, 소비로 기업 이윤에 타격을 준다는 생각은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공상을 좇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선 노동력 판매, 즉 취업을 해야만 하는데, 반대로 인간의 노동력이 판매 대상이 될 정도로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체제에서 소비 행위를 회피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이런 거부할 수 없는 현실 때무에 오늘날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근본주의 대안은 상품시장과 노동의 소외를 폐지하는 반자본주의 노동자 혁명이거나 아니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소생산자급자족 공동체 밖에는 없습니다.

소생산자 공동체는 사실상 도시 노동자들이 귀농하자는 것인데, 막대한 식량과 재화, 서비스를 쌓아두고도 수억 명을 굶겨 죽이는 체제의 부정의를 바꾸는 것은 더 힘들어지는 대안이 아닌가 합니다. 국가권력에 대한 정치적 도전을 회피할 뿐아니라, 소생산 공동체의 경제력으론 대기업들의 경제력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6.
결국 윤리적 소비 운동의 기업 비판은 기업을 변화시키는 개혁주의 대안으로서 종합하면, 윤리적 자본주의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정상적인 작동이 착취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근본에서 윤리적 자본주의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기사에서 썼듯이 나쁜 기업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시장 경쟁 아래서 개별 기업은 경쟁을 위해 생산비용을 줄이고, 노동자에게 더 일을 시키고 노동자 수를 줄이며, 다른 사회 책임 투자를 줄여야 합니다.

그래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회 책임 투자, 은행 이윤의 지역 재투자, 사회적 기업 등 착한 기업 만들기 프로젝트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기업은 하나의 이윤기계인데, 그 속성상 사회 책임 투자조차 직간접적이거나 장단기적으로 이윤을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복지 투자는 중장기 시야에서 기업 이미지 마케팅이 가장 큰 목적입니다.

시중은행들의 막대한 수익과 경영자 고임금이 문제가 되자, 2006년경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은행들이 강조한다거나[각주:8], 아들 문제로 폭력 사건을 일으킨 김승연의 한화그룹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을 늘린 것이 대표 사례입니다.

가장 위선적인 것은 삼성이 또 하나의 가족이니 뭐니 하는 것이겠죠. 이들은 일정액의 사회적 기부를 통해 법인세 감면 효과도 노립니다.

요즘 유행하는 사회적 기업도 마찬가지인데, 한국의 사회적 기업은 대부분 국가 보조 없이는 운영이 안 됩니다. 이윤을 못 남기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고된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립니다. 경쟁력 부족은 틈새시장과 국가보조, 개인 기부에 의존하게 만듭니다. 

사회적 기업이 이명박 같은 친(나쁜)기업 정부에게 의존하려는 이유[각주:9]인데, 이들이 스스로 이윤을 내서 독립적으로 생존하려면 지금보다 더 비용을 절감하는 경영, 즉 이윤 확보를 가장 우선하는 경영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사회적기업의 업무 영역과 관계있습니다. 사회적기업은 대체로 업무 자체가 복지 대행인 경우가 많습니다. 행복도시락 등이요. 그런데, 이런 복지는 조세를 통해 국가복지로 해야 합니다.

국가복지를 민영화하는 것은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자, 복지를 탈정치화하자는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이기도 합니다. 관료주의와 시장 효율성을 대립시키는 방식의 논리인데요, 본질은 복지비 부담을 누가 질 것이냐 하는 겁니다. 

결국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어느 시점에서는 사회적기업과 국가복지와 충돌할 수도 있다는 뜻인데요, 왜냐면 해당 분야에서 국가복지를 강화하면 사회적기업의 영역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사회적 기업도 경영자본이 필요한 점에서 다른 기업과 다르지 않다. 이윤 추구를 억제하려면 자선에 의존해야 하는데, 자선에 의존하는 것은 스스로 ‘기업’이라고 부르는 것과 너무 동떨어진 행동이다. 국가 보조와 개인 기부에 의존하는 것은 자생력 있는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내보이는 일이다.



7.
그런데, 이 문제들은 비영리(NPO[각주:10]) 은행이 있다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첫째, 자구책은 될지언정 사회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는 재원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둘째, 비영리 은행도 돈은 갚아야 합니다. 자급자족 공동체가 아니라면 사회적 기업은 비영리 은행의 대출을 받아도 앞서 그 돈을 갚으려면 앞서 지적한 경쟁=이윤 창출 압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셋째, 결국 받은 돈으로 해야 할 일은 시장에 나가 돈을 버는 일입니다. 구조적으로 시장 경쟁은 모든 참가자에게 성공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시장이 지배하는 구조와 대결하지 않으면  뭔가 다들 부실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비영리 은행이 기여할 수 있는 건 소생산자(농민)들이 자급자족 공동체를 꾸리는 경우 정도입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는 사회의 총체적 거부는 될지언정, 총체적 변혁 전략은 아닌데,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온존한다는 점에서 체제 거부 자체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경우, 자급자족 공동체조차 필수품을 구하려고 자신들의 농산물을 팔아야 합니다. 물론 유기 농산물인데, 이렇게 되면 결국 이들도 시장을 통해 체제의 다른 생산자들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 공동체는 자신의 삶은 바꾸지만, 사회 구조는 단 하나도 바꾸질 못합니다.

8.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막강한 소수의 기업들은 막대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과 배분을 결정하지만, 그 결정은 무정부적 시장에서 혈투와 같은 경쟁의 시험대를 통과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어떤 기업도 나쁜 기업이 돼야 한다는 압력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경쟁은 주기적인 과잉생산 위기를 낳습니다.

국가는 노동자들의 세금으로 기업들을 지원하고, 부동산 투기 거품을 부양하며, 이런 기업들이 경영에 실패해 노동자를 짜를 때면 경찰을 보내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때려 잡습니다.

그래서 나쁜 기업을 없애려면 국가권력에 도전하고,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없애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소비 투표가 아니라 기업들을 민중적 민주적 계획 아래 종속시켜 민주적으로 생산을 결정해야 합니다.

□ 참고도
《세계에서 빈곤을 없애는 30가지 방법》(알마, 2007)
《굿머니 ― 착한 돈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착한책가게, 2010)
《천규석의 윤리적 소비》(실천문학사, 2010)
《나쁜 기업》(프로메테우스, 2008)

□ 참고기사

※ 지역화폐는 다루지 않았는데, 한국에선 아직까지 영향력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1. 이명박 사돈 기업으로 위험한 작업 환경으로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는 데도 처벌받지 않는 죽음의 공장으로 불린다. [본문으로]
  2. 기업의 절대 규모가 커지는 것. [본문으로]
  3. 경쟁하는 기업의 수가 줄어드는 것. 즉 집적과 집중이란 시장 경쟁이 갈수록 덩치가 커지는 소수의 기업들의 지배로 바뀌는 현상. [본문으로]
  4. 옥스팜은 공정무역이 과잉생산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공정가격으로 5백만 자루(약 1억 달러)를 사서 폐기 처분하자고 제안합니다. 이것이 공정무역운동의 초라한 현실입니다. [본문으로]
  5. 대체로 축적된 자본의 규모와 이에 따른 국가에 대한 영향력이 이 힘의 크기를 결정한다. [본문으로]
  6. 사실, SSM이 들어오기 전까지 동네 슈퍼들도 그 동네 수준에서는 경쟁을 통한 집적과 집중 과정을 거치곤 했습니다. [본문으로]
  7. 이 구매 과정이 아까 말한 소득의 배분 과정과 동일합니다. [본문으로]
  8. 서민 대상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을 이명박이 박원순 변호사에게서 빼앗아 갔다고 문제가 됐었는데, 이 사업을 애초에 후원한 하나은행은 비정규직 차별이 가장 심한 은행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으로]
  9. 사회적 기업은 법인세 추가 감면 등 세제 지원과 국고 보조를 바라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10. Non Profit Organigations.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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