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가 오늘 분신했습니다.(☞ 관련 기사와 사진[각주:1]) 이 노동자는 공장 점거에 참가했다가 어머님이 위독하셔서 잠시 공장에서 나왔는데, 사측 용역깡패들에 막혀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해 분노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현재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깨어나 동료 조합원들에게 “끝까지 싸우자”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노동자가 분신까지 가게된 것은 불법 파견으로 구속돼야 할 정몽구는 오히려 정부의 비호를 받고, 죄없는 노동자들은 폭력경찰과 용역깡패들에게 두들겨 맞는 현실에 분노하고 절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아침 <조선일보>는 부당한 차별과 노동자들의 고통에는 아랑곳 없이 파업으로 생긴 손실액이 5백40억 원을 넘었다고 호들갑입니다. 

현대차 사측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시키는 대로 일이나 하고, 그만 두라면 그만 두는 정말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천대해 왔는데, 그 별 볼 일 없는 존재들이 몸을 한 번 일으키니 그 거대한 공장이 멈추고 사장들이 챙겨야 할 수백억 원의 돈이 나오질 않습니다. 그들이 일손을 멈추니 말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진정으로 현대차 공장을 움직이는 주인이었던 것입니다. 저들의 피해 운운은 오히려 그동안 노동자들이 얼마나 높은 생산성으로 일해 왔는지 반증하는 말일 뿐입니다.


△ ‘사원증’은 정규직 사원증을 말합니다. 한맺힌 요구인 것이죠. 비정규직지회에서 분신 동지의 이름을 ‘황인화’ 동지로 수정했네요.



2. 올해 7월 25일 대법원은 현대차 울산공장의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였던 최병승 씨가 낸 소송에서 최병승 씨가 ‘불법’으로 비정규직 취급을 받았다고 판결했습니다. 11월 12일에는 아산공장에 있던 노동자들이 낸 소송에서도 고등법원은 비정규직으로 일을 시키는 것은 ‘불법’이므로 이들을 모두 정규직으로 바꿔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대법원 판결을 쉽게 말하면, 자동차 공장은 컨베이어 벨트라는 생산 라인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배치돼 일하는데, 이 라인 안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일하고 있다면(혼류생산) 이 비정규직은 현대차에 직접 고용된 것으로 봐야 하고, 이 가운데 2년 이상 근무자는 정규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1월 고법 판결은 좀더 진전됐는데, 한 라인이 아니라도 한 공장 안에서 종합적인 공정 아래 있다면 앞서와 같이 직접고용과 정규직으로 봐야 하다는 겁니다. 

판결의 법적 의미에 관한 보충 해설(글 흐름과 별개이니 건너 뛰고 필요하신 분만 읽으세요)

이 법적 다툼에서 현대차 사측은 합법 도급[각주:2]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측의 말대로 이들이 도급 노동자라면 별도 라인에서 일해야 하고, 원청의 업무 지시를 받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파견은 원청의 업무 지시를 받을 수 있는데, 파견법은 현대차 같은 제조업 공장에서 정규직이 일하는 라인에는 파견 노동자르 쓰면 안 된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차는 원청인 현대차 관리자의 지시로 정규직과 동일 업무를 수행했으므로 사측 말대로 합법 도급이 아니라 불법으로 파견 노동자를 사용한 게 되는 거죠. 이것이 바로 2004년 노동부 근로감독관이 당시 현대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1만여 명에게 불법 파견 판정을 내렸던 이유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현대차 직접고용으로 봐야 하고 2년을 넘긴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주장이 법적 정당성을 얻게 된 것입니다.

2006년 개정 전 파견법은 파견 노동자로 2년 이상 계속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간주한다는 고용의제 조항을 두었기 때문에 이번 대법 판결은 이미 2004년에 근무년수 2년을 넘긴 시점부터 이미 정규직 노동자인 것이고, 따라서 부당하게 주지 않은 밀린 임금부터 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2006년 파견법을 개악하면서 정부와 기업주들은 파견 가능 업종을 늘리고 2년 이상 고용의제를 고용의무로 바꿨는데, 고용의무는 정규직으로 간주한다가 아니라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규직으로 바뀌는 데 사장에게 한번 더 선택권을 주는 것으로 개악입니다. 그러나 고용의무든 의제든 그 조항의 취지는 비정규직 사용을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므로 이미 2년이 넘어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 그리고 불법으로 간접고용 취급을 받는 노동자들은 직접고용 정규직화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심지어’ (저들이 만든) 법에 비춰 봐도 정당합니다.


우스운 것은 이번 대법원 판결 전까지 전 단계에서 최병승 씨는 모두 졌다는 겁니다. 2004년에 시작된 법적 단계에서 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 지방법원, 고등법원까지 법원은 이 명백한 불법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2004년 노동부 근로감독관조차 현대차 울산공장 사내하청 비정규직 1만여 명이 불법 파견에 해당한다고 판정해 놓고도 정작 판결에서는 이를 적용하지 않았고, 검찰은 이 불법 사실을 수사하거나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노동부 직권으로 징계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공정 사회를 집행해야 할 자들이 현대차 정몽구 일가 편에 뭉쳐 섰던 것입니다. 

더 우스운 것은 이 파견법조차 노동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업들이 요구해 만든 법이라는 겁니다. 1998년 정리해고 등과 함께 IMF 경제 위기르 빌미로 도입된 악법으로 비정규직 양산에 지대한 공헌을 한 법입니다. 바로 전 해에 민주노총이 대중파업으로 막아낸 날치기 법안 중 하나였습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만든 악법조차 자기들이 조금이라도 불리하다 싶으면 지키질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올 7월과 11월 법원 판결이 중요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물론, 대법 판결은 2년 이상자로서 한 라인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만 적용한 판결이라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합리적 판단을 해 보면, 2년 미만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고 정규직화하는 게 문제가 될 이유는 없습니다. 악법조차 그걸 금지해 놓은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들도 불법 파견인 건 명백하니까요.

문제는 정부와 기업주들은 자기들이 만든 법조차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래서 지금처럼 어차피 법원 판결도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직접 행동으로 투쟁을 해야 현실화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이 정당한 첫째 이유입니다. 

△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단호한 투쟁이 연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제 공장 바깥의 연대가 그들에게 힘을 줘야 한다. 무엇보다 공장 밖 연대가 정규직지부의 더 큰 연대투쟁을 만들어 내도록 해야 한다.



3. 이런 불법 행태로 그동안 현대차 사측은 엄청난 이익을 누린 셈입니다. 1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에게 같은 근속년수 노동자들의 60퍼센트 정도밖에 임금을 주지 않았니 그밖에 정규직 직원에게 가는 직원 복지까지 더해 엄청난 임금을 체불한 셈입니다.

그 대가로 현대차 기업은 현금만 7조 원이 넘게 보유하고 있고, 정몽구는 9백억 원이 넘는 전용기를 타고 다닙니다. 정몽구의 아들 정의선은 지금 시가 총액이 2조 원이 넘는 주식 부자가 돼 있고, 세금 덜 내고 그룹 경영권을 통째로 승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답니다. 대기업의 성장은 경영을 잘 해서가 아니라 노동자를 잘 쥐어짠 결과물인 것입니다.

그러니 엄청난 임금 체불도 이들이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이간질하고 차별하면서 쥐어짜 챙겨 가져간 것들에 비하면 크다고 볼 수 없습니다. 현대차 공장의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데 드는 비용은 2천 5백억 원으로 추산합니다. 현대차 같은 거대한 공장에서 지금같은 수익 구조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일입니다.

현대차는 정부의 특혜도 받았습니다. 2008년 말 경제 위기가 터진 후 정부는 자동차 구입자들에게 면세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자동차 기업들의 판매 감소를 막으려고 예산을 투입했습니다. 그러니까 현대자동차는 안에서 부당하게 임금을 체불하고 밖으로는 국민 세금으로 경영을 지원받아 온 것입니다. 그 대가를 기업주가 맘대로 할 수 있는 돈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차 사측이 이런 불법 행위를 사과하고 시정하지 않는 것은 이런 불법 파견 행태가 현대차 공장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제조업 공장들이 이런 꼼수를 부려 왔고, 2004년처럼 불법 판정을 받고도 현대차 경영진이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악행이 지속해 온 것입니다.

이런 불법 파견은 현재 만연해 있고, 현대차 옆 공장인 현대중공업도 1만 명이 넘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부려 먹고 있습니다. 더 많은 기업들이 불법 파견으로 돈을 벌어 왔고 현대차는 이들을 대표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짓밟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계급 불평등이 이들의 파업이 정당한 둘째 이유입니다.

△ 서울시청 덕수궁 앞 플래카드. 서울중부지역 진보단체들 7곳이 종각, 대학로 등 서울 도심 곳곳에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 지지 플래카드를 부착했다. 다함께 중북부, 민주노동당 종로위원회·중구위원회, 민주노총 서울본부 중부지구협의회, 서울중부민중연대, 공공노조 의료연대지부, 한국노총 세종호텔노동조합입니다.


4. 사실 현대차 사측은 1998년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들을 대량해고하려다 여의치 않게 되자 정규직 신규채용을 거의 하지 않고 편법(그러나 불법)으로 사내하청 비정규직으로 늘리는 꼼수를 부렸던 것입니다.


힘없는 이들로 제조 공정을 채우면서 노동의 유연화를 달성한 거죠. 언제 잘릴 지 모르는 상황이라 노조 만들기도 쉽지 않고 그러니 기업주로선 쉽게 고용하고 쉽게 자를 수 있으니까요. 

같은 공정에서 정규직과 함께 같은 일을 해 왔는데도 사측은 이들에게 같은 근속년수의 정규직보다 30~40퍼센트 적게 임금을 주고 아무 때나 잘랐습니다. 직원복도 안 주고, 공장 출근 때 정문 출입도 못 하게 하고 직원 통근 버스도 못 타게 했습니다. 회사가 망할 지경만 아니라면 누구나 다 받아 집에 들고 가는 조촐한 명절 선물도 못 받았습니다. 

설움에 복 받쳐 노조를 만들려다 죽지 않을 정도까지만 두들겨 맞고 공장에서 끌려 나오고 해고됐습니다. 당연한 권리인 월차 휴가를 신청했다고 두들겨 맞아 병원에 입원했는데, 관리자가 찾아와 누워있는 이 노동자의 발목을 식칼로 긋는 일도 있었습니다. 너무 절망적이라 분신하며 항거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번 파업의 시작이 된 15일 아침도 사측의 무지막지한 폭행이 벌어졌습니다. 동성기업이라는 한 하청업체가 폐업한다는 명분으로 사내하청 비정규직들을 해고한 것이 발단이었는데, 이 노동자들 29명이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공장에 들어가자 사측 관리자와 용역깡패 수백 명이 몰여 와 집단 폭행을 한 것입니다[각주:3].

이 업체 폐업은
불법 파견을 판정을 받은 후 혹시라도 2년 이상 정규직화 요구가 더 커질까 봐 미리 선수를 치는 차원에서 해고를 한 꼼수였습니다. 부당해고와 폭력 사태에 항의하면서 이번 파업이 시작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번 점거 파업은 사측의 선제 공격에 맞서는 파업인 것입니다.

지금도 공장 안에는 현대차 관리자들과 용역 깡패들이 완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살점이 떨어지고 귀가 찢어지며 갈비뼈가 부러지는 폭력을 당했고 일주일 만에 50여 명이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그래 놓고 사측은 자기들이 노동자에게 맞았다고 보도 자료를 뿌렸고 친재벌 언론들은 그것을 앵무새처럼 보도합니다.[각주:4]

생각해 보세요. 엄연히 법치국가라는 곳에서 법에 보장된 노조를 만들려 했다고 다 큰 성인이 머리 쥐어 박히고 발길질 당하면서 끌려 다니는 모습을. 그 모욕을 왜 참고 있어야 하는지.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온갖 폭력과 협박에도 지금처럼 완강하게 파업을 하는 이유는 사용자들이 지금까지 저질러 온 차별과 천대, 탄압에 당해 왔던 복받치는 설움의 역사를, 억울한 현실을 이제는 벗어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이 정당한 셋째 이유입니다.[각주:5]

△ “우리 노동자는 하나다” 이것은 실질적인 투쟁 구호가 돼야 한다. 저들이 계급투쟁을 시작한 만큼 우리도 노동계급이 총단결하는 투쟁으로 맞서야 한다. 현대차와 기아차 정규직지부는 신속한 승리를 위해 최근 가장 잘 나가는 차종들 생산을 멈추겠다고 경고하고, 연대파업을 준비해야 한다. 노동자 단결의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전투를 넘어 전쟁의 승리로 가는 초석이기 때문이다. 정몽구가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를 죄인 취급하는 노동귀족론을 시원하게 반박해 주길 바란다.



5. 정부와 기업주들, 그리고 그들의 나팔수인 보수 언론들이 이제 힘을 모아 현대차 사측을 응원하고 지원할 것입니다. 요컨대, 저들은 노동자들을 상대로 계급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저들은 단결하고 쉽게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론도 관리에 들어가서 노동자들이 폭행당하는 소식이나 투쟁의 정당성은 기성 언론―방송과 신문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바라고 노동자들의 삶과 미래가 존중받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모두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의 편에 서서 연대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편의 계급투쟁입니다.

저들이 만든 법인데, 그 법을을 지키라고 노동자가 분신까지 해야 하는 것이 저들이 말하는 ‘법질서’입니다. 전태일이 분신한 40년의 세월 변화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없었던 것일까요. 불타야 할 것은 죄없는 노동자들의 몸이 아니라 소수의 탐욕을 위해 다수를 짓밟는 이 사회의 시스템이고, 체제의 비인간성입니다.

그래서 현대차와 기아차의 정규직지부, 즉 같은 기업주 즉 공동의 적을 두고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더 큰 연대로 이 싸움을 도와야 합니다. 지부 차원의 전면 파업을 하면 가장 좋겠는데 그 전에라도 아반떼나 K5 같은 
잘 나가는 신차 라인을 세우면 좋겠구요. 그런 라인을 세우겠다는 경고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현대자동차는 한국 경제의 핵심 공장이므로 이 공장 안의 정규직-비정규직 연대가 어느 공장보다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공동의 적에 맞선 정규직-비정규직의 단결은 전투를 넘어 전쟁의 승리를 위한 초석이 될 것입니다. 공장 바깥의 연대는 바로 이 연대를 고무할 수 있습니다. 이 연대에서 초점은 누가 뭐래도 민주노총이겠죠. 그리고 양식 있는 시민들이 민주노총의 투쟁과 파업을 응원할 것입니다. 

대표 자본가 격인 현대차 기업주(정몽구 일가와 그 똘마니들)를 우리 연대와 단결된 투쟁으로 물러서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많은 기업들에서 우리의 승리를 반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힘으로 더 많은 정규직 일자리를 요구하며 더 크고 더 깊은 연대를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이 정당하고 승리해야 하는 결정적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은 우리 모두를 위한 투쟁입니다.

■ 관련 기사들: 집중 이슈 ―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

다음 아고라 청원: 현대차 비정규직 상황을 알리고 싶습니다

■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 쟁점 해설 소책자:


우리 모두를 위한 투쟁을 위해 이렇게 연대합시다


●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사기를 높이고 자신감을 고무하기 위해 자신이 속한 노조ㆍ단체ㆍ동아리ㆍ학생회 등에 제안해 파업 지지 성명을 내도록 합시다.

●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웹사이트에 투쟁 지지글을 올리고, 공장에 부착할 지지 배너(현수막)나 대자보 등을 제작해 보냅시다.

- 노동조합 홈페이지 : http://hjbtw.jinbo.net/

- 노동조합 주소 : 울산 북구 양정동 700번지 현대자동차 내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조합

- E-mail : hjbtw@jinbo.net

● 인터넷 카페,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Daum <아고라>와 각종 사이트에 투쟁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지지와 연대를 호소하는 글을 올립시다.

● 청와대ㆍ고용노동부에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현대차 사측의 탄압에 항의하는 글을 올립시다.

청와대 자유게시판 : http://www.president.go.kr/kr/community/bbs/bbs_list.php

고용노동부 열린게시판 : http://www.moel.go.kr/view.jsp?cate=1&sec=5

● 대법원 판결조차 무시하고 정당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탄압하는 현대차 사측에 항의 전화를 합시다.

- 현대차 고객센터 080-600-6000

- 현대차 울산공장 052-280-2114

●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 지지 집화에 참가합시다.

●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 기금이 필요합니다. 연대 기금을 모읍시다. 

[농협 356-0389-6435-43  임보라] (현대차비정규직지회 공식 후원 계좌)





  1. 분신 장면은 너무 가슴이 아파서 제 블로그에 올리지 않습니다. 현장을 보고 싶으신 분은 링크로 들어가서 확인하세요. [본문으로]
  2. 도급과 파견의 차이는 원청 사용자의 업무 지시를 받느냐 하는 차이다. 도급은 하청업체의 지시를 받는 것으로 일하는 장소만 원청일 뿐이다. 그러나 파견은 원청 사용자의 지시를 받는다. 기업주들은 이 제한을 없애고 싶겠지만 파견법은 제조업 라인 공정 안에서는 파견 노동자를 쓰지 못하도록 했다. 파견법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한 것인데, 최소한의 양심만 발휘한 것이다. [본문으로]
  3. 폭행 동영상 주소. http://www.youtube.com/v/iQEg5zkGHhE?fs=1&hl=ko_KR [본문으로]
  4. 대표 레파토리가 임금 뻥치기, 파업 손실, 이런저런 도덕성 매도입니다. 조선일보는 심지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귀족 노동자로 매도하더군요. 이중 파업 손실과 관련해 두 가지 핵심 반박 논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파업이 손실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친자본주의 경제학에서도 파업 손실은 당연한 것이고, 기업주는 파업 손실과 노동자 요구 수용에 따른 경제적 부담 사이에서 최적점을 찾는 것입니다. 둘째는 근본적으로 파업 손실액은 파업 노동자의 임금 총액보다 큽니다. 이것은 노동자 착취의 증거이고, 지금까지 공장을 돌리고 실제로 이윤을 만들어 낸 주역은 노동자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본문으로]
  5. 더 자세한 투쟁 소식은 http://left21.com/6_issue.php?issue_no=85을 참고하세요.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

민주노동당이 건강보험 하나로 법률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건강보험 보장성을 90퍼센트로 높이되, 그 재원을 기업주와 정부가 부담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법안을 지지한다.

그런데 ‘건강보험하나로시민회의’(이하 시민회의)의 이상이 교수는 이 법안을 “낡은 진보[각주:1]”라고 공격했다[각주:2].

이상이 교수와 시민회의는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이려면 부자든 노동자든 건강보험 가입자가 모두 보험료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특히, 노동자들이 먼저 보험료를 인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지금의 계급 역관계와 정치현실”에서는 정부와 기업주에게 재원 부담을 강제하는 것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각주:3].

그래서 “누진적, 연대적 방식으로 세금을 기꺼이 더 내겠다는 ‘깨어 있는 시민[각주:4]’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이 교수도 “누구나 정당한 권리로서 일정한 소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는 말한다. 세금을 내려면 소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보편적 증세에 기울어져 있다. 복지국가를 투쟁으로 쟁취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한국에선 보편적 복지로 혜택을 받은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조세 저항이 더 일반적이라고 한탄한다. 그래서 진보정당은 사람들을 설득해 “깨어 있는 시민”을 늘려야 한다.

그런데 “낡은 진보”가 정부와 기업주를 상대로 싸우자고 주장하면서 “이것을 가로막는다.” 이것이 그가 “줄기차게 진보의 재구성을 주장하는 이유다.” 그의 진보대통합 구상은 기존 진보정당들이 급진좌파를 배제하고 민주당 안의 이른바 진보적 자유주의와 연합하자는 것이다.


우선순위


이상이 교수는 보편적 투쟁이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그리고는 노동자들이 내는 돈이 적어 건강보험 보장성이 낮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료율은 소득의 5.3퍼센트에 그쳐 유럽 복지국가들의 14퍼센트나 이웃 일본과 대만의 8.5퍼센트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 이로 인한 국민건강보험의 낮은 보장수준 때문에 우리네 가계의 80퍼센트가 민간의료보험을 하나 이상 구입하고 있[].”

이 교수를 비롯해 시민회의는 공급자 통제, 곧 병원과 제약회사들이 건강보험 재정을 축내는 것이나 기업주와 정부의 보험료 부담이 너무 낮은 문제는 건드리지 않는다.

OECD 평균 기업의 사회복지 지출 기여 비율은 5.4퍼센트이고 노동자는 3.1퍼센트다. 그런데 한국은 거꾸로 기업이 2.5퍼센트 노동자가 3.3퍼센트다.[각주:5]”(우석균, <프레시안>)

1인당 보험료는 200433천 원에서 20085만 원으로 [52퍼센트] 늘었다. … 반면 국고지원은 … 16퍼센트 증가했을 뿐이다.”(최윤정, 《사회운동》 7~8월호)

그는 건강보험 국고 지원 확대 요구를 두고 “국가재정 지출의 우선순위에서 다급한 여러 복지 분야보다 앞서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교수와 그 동료들은 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캠페인을 ‘최우선’ 사업으로 올려놓았을까?

이 교수는 재정을 늘리는 게 중요하지 재정 안에서 우선순위를 따지는 것은  돌려막기에 불과할 뿐이라고 주장하는데, 재정 안에서 우선순위가 분명하지 않다면 재정을 늘린다고 자동으로 복지가 는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예를 들어, 그가 복지 재원 확보를 위해 군비를 줄이자고 주장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각주:6]. 재원 마련과 재정 배분을 관통하는 핵심은 국가와 사회의 운영에서 무엇이 ‘우선순위’냐 하는 문제다. 

그래서 보편적 복지국가를 위한 투쟁에서 핵심 과제는 국가 재정과 기업 이윤을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지금 내고 있는 세금보다 약 37퍼센트를 더 내야 OECD 평균수준의 조세부담률에 도달한다”는 이 교수의 주장도 탁상공론이다. 현실은 전체 소득세 대상자 가운데 소득이 적어 세금이 면제되는 대상이 43.5퍼센트에 이른다는 것이다. 

면세점 이하의 사람들에게 세금을 내라고 할 것이 아니라면 결국 재원은 부자 증세여야 한다기업주와 부자들에게 유리한 조세 구조를 개혁해야 하고, 부자 증세를 해야 한다. 소득세만이 아니라 법인세도 다시 올려야 한다. 삼성전자의 실효세율은 약 11퍼센트밖에 안 된다[각주:7].

문제는 정부와 기업주들이 이것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 복지를 최우선 순위로 놓으려면 대중 투쟁은 필수적이다. 필요한 것은 이 투쟁을 강화할 정책이다[각주:8].


건강보험하나로시민회의와는 다른 무상의료 캠페인이 11월 7일 전국노동자대회 장소에서 진행됐다. 복지국가는 일종의 계급 세력 관계에서 혁명 vs 개혁·현상유지 사이의 타협 체제다. 복지국가는 쟁취도 유지도 조직된 노동계급의 힘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1. 이상이 교수 등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정책 참모 구실로 정권과 연계됐던 지식인들이 꽤 있다. 이들이 더 좌파적인 진보 정책을 ‘낡은 진보’라고 공격하는 것을 보면 당시 정권 지지파들이 진보좌파들에게 ‘수구좌파’라는 모욕적 언어로 공격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본문으로]
  2. 이와 관련해 건강보험하나로시민회의와 관련 있는 민주노동당 두 국회의원 국회 사무실에 문의 전화를 했다. 권영길 의원실은 당론과 다른 시민회의의 견해에 의원실 차원에서 지지를 보낸다는 입장을, 곽정숙 의원실은 큰 차이가 없다고 보고 의원 개인 자격으로 시민회의에 참가는 하지만, 정책 내용은 명백히 다르다는 점을 밝혔다. 곽 의원실은 본인이 대표 발의한 법안―보험료 선제 인상을 배제하는 이 법안―이 당론이며, 의원실의 입장이라고 밝혔다. [본문으로]
  3. 건강보험하나로시민회의 등 선제적 양보론자들의 주장은 기묘한 논리적 조합을 이루고 있다. 투쟁으로 복지를 쟁취할 수 없다는 비관적 전제와 ‘우리가 먼저 양보만 하면’ 자본이 기꺼이(평화롭게) 양보할 수 있다는 초낙관적 결론의 조합. 이 조합은 핵심적으로 계급투쟁 이론과 전략을 기각한 데서 비롯한다. [본문으로]
  4. 복지국가 논의에 깨어있는 시민 용어를 끌어들인 것도 우습지만, 명백하게 정치인 노무현의 유지처럼 돼 있는 ‘깨어있는 시민’은 정치적 시민권을 자주적으로 행사하려고 행동하는 시민을 상징한다. 이 단어의 탄생과 유통에 담긴 맥락은 보험료나 세금을 더 내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본문으로]
  5. 《한국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에서 이상이 교수 본인이 정세은 교수와 함께 쓴 ‘역동적 복지국가를 위한 재정 및 조세 제도 개혁의 모색’에도 비슷한 통계가 인용되고 있다. OECD 국가들의 총 조세 수입 대비 조세 수입 항목 구성 표(2004 기준)를 보면, OECD 평균 사회보험 분담금이 23.4퍼센트(노:8.5/사:14.9)인데, 한국은 20.7퍼센트(노:12.1/사:8.6)로 한국은 역진적이다. [본문으로]
  6. 결국, 이들이 기존 예산을 건들지 않고, 보편적 증세로 보편적 복지를 하자는 것은 복지 수혜자와 복지 비용 부담자를 일치시키자는 논리인데, 이는 자칫하면 신자유주의의 수익자 부담 논리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것은 설득력보다는 보편적 복지론의 정당성을 약화시킬 뿐이다. 보편 복지를 받으려면 보편 납세를 해야 하고, 이를 위해 보편 증세를 해야 한다는 논리는 소득이 적어 납세나 증세에 동참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복지의 정당성을 공격하는 논리에 이용될 수 있다. [본문으로]
  7. 깎인 법인세가 23퍼센트니 절반도 다 안 내는 셈이다. 이는 평균 19퍼센트 정도로 추정되는 중소기업 실효세율보다도 낮은 것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순익 10조 원을 벌었다고 했는데, 이 경우 1조 원의 세금을 덜 낸 것이다. [본문으로]
  8. 계급 분단선을 분명히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아울러, 건강보험하나로시민회의와 이상이 교수가 민주노동당의 과거 구호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구호가 잔여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사실 부자에게 보편 복지는 거추장스러운 복지 혜택보다 증세 압박이 더 중요한 문제다. 그 점에서 ‘부자 증세 서민 복지’가 반드시 잔여주의인 것은 아니다. 이상이 교수의 부당한 비판은 보편 증세론을 정당화하려는 부당한 왜곡에 불과하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1. 올핸 ‘공정 사회’가 화두입니다. 오죽하면, 특권층만 대변한다고 욕 먹는 대통령이 ‘공정사회’를 만들겠다고 나섰을까요.

대통령이 공정사회를 말하면서 함께 언급한 《정의란 무엇인가》가 수십만 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됐답니다.

‘따분한’ 대학 교재가 베스트셀러가 됐으니 실제로 우리 사회의 정의에 관해 많은 이들이 관심과 의문을 갖고 있다는 한 방증이라 할 수 있겠죠. 물론 따분하지 않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이 많은 이들에게 내용 면에서 공감을 얻은 건 공리주의와 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정의 개념의 허점들을 짚어낸 것이었을 겁니다.

최대다수의 행복이나 능력에 따른 보상이란 게 실제론 공정한 게 아닐 수 있다는 마이클 센델의 지적은 많은 이들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달래 줬을 겁니다. 한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한 나라로 치는 미국, 거기에서도 최고 엘리트인 하버드 대학 교수의 말이니까요.

아쉬운 것은 그의 공동체론이 우리가 어느 공동체에 본질적인 정체성을 둘 것이냐 하는 점에서 그다지 해 줄 말이 없다는 것일 겁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구속력 강한 공동체는 정치 공동체, 즉 국가니까요.

국가가 모든 이들을 포괄해 통치하고 유일한 공적 강제력으로 기능하지만, 그 국가가 지배하는 사회는 계급으로 분단돼 있습니다. 국가의 본질을 논하기 전에도 우리가 직관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데, 현실에서 국가는 자기 사회에 속한 모든 계급에게 공정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제와 어제, G20 모임이 있었고, 회담장 바깥에선 이 회의를 규탄하고 반대하는 시위와 행진이 있었습니다. 이 시위의 핵심 구호는 “경제 위기 책임을 전가하는 G20을 규탄한다” 였습니다. 부자와 빈자 사이에서 국가들이 공정하지 않게 경제 위기의 책임을 배분한다는 것입니다. 

G20 홍보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린 사람은 연행되지만, 그 G20을 개최하는 국가의 세금을 축낸 이들은 국가의 존중을 받습니다. 국가의 법을 어겨도 국가가 나서서 사면해 줍니다.

이처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직관적 통찰 때문에 ‘공정 사회’와 ‘정의’에 관한 갈구는 더 커져 가는 듯 보입니다.

2. 최근엔 방송 오락 프로그램에서도 공정사회와 관련한 코드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슈퍼스타K>에 관심을 보였고, 쉽지 않은 기회를 잡으려는 청년들, 특히 불리한 조건의 청년들에게 열광했습니다[각주:1].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에서는 여성과 중인, 소수 당파 유생 등 비주류 등이 주인공으로 나왔고, 여성에게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을 새로운 조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두 프로그램 모두 프로그램 안에서는 공정한 기회가 주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졸 학력으로 제대로 음악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허각이 우승해 그를 응원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감동시켰습니다[각주:2]. 성스에선 김윤희가 결국 남장 여자로 이중 생활을 계속 하는 결론을 제시합니다.

이런 환상적인 결론은 해당 프로그램에 동화된 사람들에게는 만족을 주겠지만,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지도 않는 것일 뿐아니라 현실을 감추기도 합니다. 

허각의 성공이 가지는 역설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왜 허각처럼 재능 있는 청년이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없었는지 하는가 하는 것과 다수가 정당한 보상이라고 여기는 그의 우승이 바로 이 문제에 관한 관심을 덮어버린다는 겁니다. 대물 김윤식의 생존도 마찬가지인데, 임금의 벗이자 충신이었던 아버지의 존재와 개인의 재능이라는 우연적 요소로 문제가 해결됩니다.

결국 현실의 한 사람과 허구 속의 한 사람이 기회를 잡는 것은 구조적 평등이 아니라 재능과 노력에 바탕한 개인적 ‘행운’의 결과입니다.

한마디로 이 프로그램들은 의도했든 아니든 이 사회에서 ‘어쨌든 기회는 존재한다’는 것과 그 기회를 붙잡는 것은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을 심어줍니다. 그것이 행운이든 노력의 결과든 재능의 발휘든 아니면 실패하든 그 모든 것은 개인의 책임입니다. 


3. 자본주의 옹호론자들은 성공할 기회가 똑같이 제공됐다면, 이 사회는 공정사회라고 말하죠. 기회가 주어졌다면 나머진 개인의 노력(과 재능) 문제일 테니 말입니다. “성공은 노력의 보상이다.” 내가 구멍가게를 차려 이건희와 사업 경쟁을 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것입니다[각주:3].

그래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학자들과 언론은 눈물겨운 성공담을 찾아 내려고 늘 노력합니다. 자본주의가 공정하고 열린 체제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말이죠.

심지어 원래 상류층 출신으로 처음부터 우월한 자금력으로 경쟁자들을 인수하면서 성공한 빌 게이츠가 첨단 기술을 선구적으로 개발해 성공한 자수성가의 사례가 되기도 하고(부모가 백만장자였어도 지금 빌 게이츠는 억만장자이므로 크게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최근엔 페이스북 창업자의 스토리가 영화화되기도 하고, 불우한 시절을 이겨 낸 운동선수와 예술가의 성공담도 이어집니다.

크롬도 파이어폭스도 이루지 못한 MS 사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보여 주는 예술적 경지. 아마 많은 분들이 경험해 보셨을 듯.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술적 성공이 아니라 하드웨어 제조사들과 독점 체제를 구축해 돈을 번 것이다. 부자들의 기부는 재단 설립을 통해 이뤄지는데, 면세 혜택을 받는 이 표면상 복지재단 운영을 세습하면서 부는 덜 욕 먹고 세습된다. 록펠러, 카네기 재단이 대표적 사례고, 한국에서도 한 번도 돈 버는 일을 해 본 적 없는 박근혜와 그 동생들이 육영재단 덕에 지금도 먹고 산다. 빌 게이츠에 관해서 쉽게 아는 방법으로 팀 로빈스가 주연한 패스워드란 영화를 추천한다.

그러나 고교 평준화가 재력에 따른 학력 서열화와 성공의 계급적 차별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결과적이고 형식적인 기회 제공만 가지고 진정으로 사람들이 바라는 공정 사회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돈 벌기든 학문이든 예술이든 성공할 기회를 제공하는 게 공정하려면, 그 기회에 임하는 자격을 갖추는 문제에서도 공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돈이 필요한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에, 이 사회가 진정한 공정 경쟁을 보장하려 한다면, 예를 들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상속을 금지시키는 일일 겁니다.

그래야 성공이 최소한 자기 재능과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테니까요. 재벌가의 자녀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공정한 경쟁으로 그 자리에 올라섰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성공에 대한 보상이란 것도 이 사회는 금전적 성공으로 획일화돼 있습니다.

문제는 상속 금지 같은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날 때부터 불평등한 현실은 사유재산이란 이름으로 보호되고, 이 불평등한 조건에서 사람들을 경쟁으로 내모는 일은 자유시장경쟁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될 뿐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국가가 없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단지 불공정한 중재자가 아니라 애초부터 계급지배의 도구인 것입니다.

오래된 농담처럼, 우리가 단무지에 라면 국물 먹고 클 때, 아무개는 인삼 깍두기에 녹용 국물을 먹으며 크는 현실에서 우리가 특정한 목표를 성취하려는 데에 필요한 모든 자원과 자격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우린 경제적 조건과 국가의 보호라는 문제에서 모두 불평등한 현실에 직면합니다.

그래서 모든 국민이 법적인 자유 신분과 공평한 권리와 의무를 진다고 하는 자본주의에서 불평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기회의 평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왜냐면, 이미 특권을 쥐고 출발하는 이들이 규칙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규칙 뿐아니라, 앞으로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게임의 규칙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국가를 지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 직면한 현실은 구조화된 계급 불평등입니다. 지배 받는 계급(노동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 사회는 결코 공정 사회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 다른 각도에서 말한다면, 계급투쟁이야말로 진정한 ‘공정 사회’로 가는 길이라는 겁니다.


4. 그래서 공정 사회가 화두가 되는 현실은 갈수록 계급 불평등이 깊어지는 현실과 대중의 깨달음을 반영합니다. 결국 공정사회와 정의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과 애착이 보여주는 것은 계급 불평등을 가리고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대중적으로 의심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이런 현상이 곧바로 계급 불평등이라는 담론과 계급 정치의 강화로 나타나지 않고 정의 같은 추상적 담론과 가치, 도덕의 문제로 논쟁이 됩니다. 이것은 아직 마르크스주의 좌파가 세력과 이데올로기에서 열세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는 (비록 가짜 사회주의였지만, 다수가 진짜라고 믿어버린-참고글) 소련의 붕괴[각주:4]라는 세계사적 요인과 국제적으로 계급투쟁 부활이한동안 지지부진했던 배경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규모 경기부양으로 세계경제의 붕괴를 막은 것도 사회의 이념 지형이 더 급진화하는 걸 막는 부분적 효과를 냈을 겁니다.

요즘 한국에선 진보정당들이 민주대연합 수준의 개혁주의가 득세하는 데에 한몫 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노조 상층 지도부가 주도하는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 프로젝트로 출발한 이 당들은 상대적으로 노동운동의 투쟁 압력이 완화된 현 국면을 배경으로 계급보다 국민, 투쟁보다 중재[각주:5], 그리고 언론용 기자회견을 더 중시하는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명백히 오른쪽으로 후퇴한 거죠[각주:6].

노동자운동이 아직 공세 국면이 아닌 단계에서 계급투쟁 정치가 주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단견이고 피상적 관찰입니다. 계급투쟁 상황이 영향을 미칠 텐데, 최근 상황은 불균등하지만 반전의 계기들은 마련되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스, 프랑스 등 유럽 노동자투쟁의 부활도 국제적으로 주목할 만한 사건이구요, 중국도 심상치 않다고 봅니다. 한국에선 노동운동의 주력부대는 건재해 이명박도 본격적으록 공격을 못 한다는 게 드러났고, 최근엔 비정규직 투쟁이 전진하고 있습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특권층 정부와 재벌 기업에 대한 사회적 불만도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 단계에선 계급투쟁을 반전시킬 계기들을 폭넓게 주목하는 한편, 자본주의 옹호론과 (이 사상들과 근본에서 단절하지 않는) 개혁주의와 벌이는 이데올로기 투쟁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크게 두드러지진 않지만 당신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 하나인 나도 당신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물론, 당신은 노동계급의 승리라고 말할 테고, 그것이 사실 맞는 말이고, 당신이 기초해 지금까지 생명력을 갖고 발전하는 사상의 정신일 것이다. 그 승리에 내가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는 말년을 맞길 바라면서 오늘도 바쁘게 산다.

5, 끝으로 마르크스주의는 정의를 어떻게 보는가. 저는 마르크스주의의 대가가 아니고 마르크스가 별도로 정의와 윤리학에 관해 저술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다분히 개인적 해석을 매우 단순한 수준에서 말해 보려 합니다. 

우선, 마르크스주의에서 사회적 정의의 기본 가치는 평등이겠죠. 

자본주의가 말하는 개인의 자유가 불평등한 조건에서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금전적 불평등만 문제가 아니죠. 그에 따른 정치권력의 독점도 존재합니다.

정치와 경제,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평등하다는 것은 사회적 생산과 분배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모두 평등하게 권한을 가진다는 뜻이고 이것은 계급 불평등이 해결돼야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근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는 사회의 경제적·문화적 발전 수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인간 사회가 더 풍족해 지고 그래서 평등의 가능성이 커지고, 사회 전체가 고양될 때, 거기에 속한 개인들도 더 많은 발전의 가능성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지향이 행복, 자아실현 등을 뜻하는 자유라고 할 때, 그 자유의 전제가 되는 것은 이처럼 진정한 평등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유를 실현하려는 조건으로서 평등은 결과의 평등보다는 (급진적 의미의) 기회의 평등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불공정 사회는 이제 인류에게 늙고 병든 짐일 뿐입니다. 이제 인간 사회의 경제적·문화적 생산력은 사회 전체를 민주적으로(평등하게) 계획하고 통제하는 것을 통해 사회와 개인들의 자유를 고양할 때 다시 도약할 수 있습니다.

그때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겁니다. 개인은 금전적 성공이라는 획일적 기준으로 자신들의 노력을 한정하지도 않을 것이고, 사회적 결정에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는 다양한 가능성의 추구라는 본질적 자유를 전례 없이 확장시킬 것입니다.


  1. 나는 본방으론 결승전 한 번 봤는데, 그뒤에 화제가 된 장면을 검색해서 보니 다들 저렇게 노래를 좋아하고 잘 하는데, 기껏해야 스무살 안팎인 청년들에게 탈락! 불합격! 같은 상처를 주는 게 너무 짠했다. [본문으로]
  2. 다른 참가자들은 대부분 따로 돈을 들여 실용음악학원에서 가수 준비를 하는 청년들이었죠. [본문으로]
  3. 이들은 이론상 단지 외교부 특채 같은 일만 없으면 공정하다고 말합니다. 늘 그렇듯 이들이 우리에게 훈계하는 말과 실제 삶은 다릅니다. 아주 많이요. [본문으로]
  4. 최근의 길지 않은 글에서 추천하자면, 본문에도 링크한 http://www.left21.com/article/7450의 글을 참고하시오. 국가자본주의론의 저작권자인 토니 클리프의 글. [본문으로]
  5. 정책 대안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건강보험하나로시민회의의 노동자 보험료 인상론이나 노동자 증세론, 국익론에 바탕한 한미FTA 재협상론 같은 게 투쟁에 해악이 되는 중재적 정책들이다. [본문으로]
  6. 이것은 민주대연합의 결속력이 완화되는 데에 계급투쟁 수위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민주대연합 노선도 거꾸로 계급투쟁 활성화에 해악적 요소로 반작용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