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려 5년 전 네이버 블로그에 썼던 논쟁적 서평인데, 20년대 독일 상황을 검색하다 발견했다. 그람시의 <리용테제>를 참고한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글 전반적으로 지금보다 더 ‘혈기방장’한 티가 난다. 지금이라면 더 차분하고 예의바르며, 좀더 간결하게 썼을 것 같다.   



《패배한 혁명》(크리스 하먼, 풀무질, 2007)의 압박이 크다. 가슴이 답답해 지고, 나는 저 상황에서 그런 재앙적 오류를 피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긴 힘들어진다.


전략 전술이란 이런저런 기계적 원리들을 이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당면 시점의 구체적 세력관계, 무엇보다 지배계급부터 밑바닥 대중까지 사회적(그리고 정치적)으로 표출되는 심리와 정서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62일 허세욱 열사 49재 집회에서 노동자해방 당 건설 투쟁단(약칭, 당건투)라는 단체에서 발행하는 <현장노동자>라는 신문을 보았다. 뭐 면식 있는 선배도 있고 하는 단체라서 유심히 지켜봐 왔는데, 이번 신문에 실린  《패배한 혁명》  서평은 대실망이었다. 틈만 나면 레닌의 흉내를 내는 사람들이 도대체 레닌의 중요 저작 중에서도 중요 저작인 좌익소아병》은 읽어나 보았는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구체적인 국면에서 어떤 전술, 어떤 정책을 취해야 할 지에 대한 귀중한 분석서인 이 책을 추상적인 혁명정당 당위론 설파 수준으로 격하시킨 것은 아쉬움을 넘어 화가 나게 만드는 일이다


물론, 당건투가 아니라 사회실천연구소 소속의 활동가가 쓴 서평이긴 하지만 자신들이 내세우는 정치 전통에 있는 도서의 서평이라면 그런 수준 낮은 서평을 이런 대규모 집회에서 배포하는 신문에 싣는 것은 자신들의 형편 없는 정치적 수준을 대중 앞에 고백하는 것에 불과하다.(아무리 계급에게 솔직해야 한다지만!!) 그것은 저자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19191월 스파르타쿠스동맹의 섣부른 봉기 시도를 예로 들어보자. <현장노동자>의 서평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사민당의 그럴듯한 말에 마음을 빼앗긴 “완전히 새로운 노동자층을 정치활동에 끌어들이는”데에도 무능력했다.(108결국 1919년 1월에 일어난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봉기는 사민당 정부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노동자계급은 화해협상의 덫에 걸렸으며이에 자신의 힘시간혁명적 열정이 파괴되는 것을 허용했다그 사이에 정부는 국가의 모든 자원을 마음대로 써가며 최종 진압을 준비할 수 있었다.”(132저자는 1월 봉기의 교훈을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평가한다. “강력한 혁명정당을 가졌다면베를린 노동자계급은 화해협상의 덫에 걸려들지 않았을 것이다.”(132)


때이른 봉기 이후 국면에서 화해협상의 덫에 걸려들지 않는 것과 봉기 자체가 애초 잘못된 정책이었다는 것은 범주가 다른 문제다. 서평 필자는 후자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사민당을 앞세운 덫에 걸려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봉기 자체가 섣부른 모험주의 였다는 점이 변하진 않는다. 그것이 설사 50만 당원을 가진 당이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19191월 스파르타쿠스 봉기의 가장 커다란 교훈은 국민대중 다수의 지지 없이 노동계급이 권력을 쥐려하는 것, 또는 노동계급 다수의 지지 없이 혁명정당이 권력을 쥐려 하는 모험주의에 대한 경계다. 섣부른 봉기는 정부의 반격을 정당화하고, 다수 대중을 사태의 방관자로 전락하게 한다. 결국, 섣부른 봉기의 대가로 실제로는 봉기 정책에 반대했던 로자 룩셈부르크 등 최고의 유능한 지도자들을 잃었다. 운동은 탄압으로 후퇴했다.


섣부른 권력 장악 시도에 대한 경계는 훗날 공동전선으로 정식화된 정책에 대한 강조로 결론나야 정당한 평가가 될 수 있다. 즉 다수를 획득하기 위한 정책(전략전술)로서 개량주의 좌파들과 협력을 통해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노동자 대중들과 접촉할 기회를 얻고 좌파와 노동계급 단결의 욕구를 대변하는 것. 이를 통해 다수 대중들이 구체적이고 생생한 자신들의 실제 경험으로 체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신들의 지도자를 떠나 극좌파에 대한 지지로 옮아오게 만드는 능력에 대한 강조로 이어져야 옳다.


역사적 기회에서 벌어진 독일공산당의 처참한 실패는 이러한 정책의 중요성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면서 모험주의 공세론과 엉뚱한 수세 전략을 좌충우돌한 대가다. 그 대가는 너무 컸다. 반혁명의 승리가 파시즘(독일에선 나치즘)의 승리와 동의어가 됐기 때문이다.


유럽 대륙에서 가장 선진적인 제국 중 하나였던 독일에서 노동자와 병사들이 제국주의 전쟁을 끝장내고 카이저 제정을 무너뜨렸다. 우리는 이런 노동자들이 왜 사민당을 뛰어넘지 못했냐고 묻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


어제까지 제국주의 강도 전쟁의 총알받이 신세이던 노동자와 병사들이 어제까지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전시에 불법이 된 좌파 정당의 집권을 지지한 것이 어찌 큰 잘못이겠는가.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들이 뿜어낸 혁명의 열기와 의지를 어떻게 그들 자신의 권력을 수립하는 것으로 나아가게끔 도울 수 있었는가다. 우리가 진정으로 실천적이라면 질문은 이렇게 던져야 한다.


<현장노동자>의 서평은 마지막을 이렇게 맺는다.


역사는 우리에게 계급협조 정책을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믿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이런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중략) 이런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단절한 독립적인 혁명정당의 필요성이다. 자본가 정치세력들의 헤게모니 하에 노동자들을 갖다 바치는 역할을 하는 사민주의 세력! 이들이 외치는 ‘진보진영 단결’이니 ‘진보대연합’이니 하는 구호가 세계노동자운동에 얼마나 큰 질곡으로 작용했는지 ‘패배한 독일혁명’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 역사는 우리에게 사민당-개량주의정당의 지도자들을 믿지 말라고 가르친다. 문제는 압도 다수의 대중들이 아직 이런 가르침을 자신의 신념과 행동지침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다는 거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저항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당면 시점에서 적절한 행동을 촉구하며 끈질기게 사람들을 설득하는 기예를 배워 익혀야 한다.


아직 변혁운동가들의 대의를 수용할 준비가 돼있지 않은 대중들과 대화하는 법을 익혀야 하고, 이들을 자기의식적인 배신적 지도자들과 구분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필요할 땐 개량주의자들을 지지하고, 먼저 협력을 제안할 줄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필요한 건 단순한 인내심이 아니라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것은 '주도면밀한 집요함'이다.


저자가 강조한 '혁명정당'이란 바로 이런 실천과 정책의 주체이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런 실천 속에서 자신들을 단련하고 대중을 획득해 가는 수단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혁명정당'이 대중을 획득하기 위한 정책을 거부하는 결론을 내리면서, '혁명정당'의 존재와 대중 장악력을 교훈으로 내세우는, <현장노동자>의 서평은 관념론(역사적 추상주의 또는 추상적 선전주의)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1923"독일의 '10'"이 왔을 때, 독일 공산당은 그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으로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노동계급 생활의 파탄과 내부적으로는 지노비에프 등 일부 코민테른 지도자들의 엉성한 지도를 교정한 레닌과 트로츠키의 노력으로 다시금 50만 당원의 정당으로 되살아 난 상태였다. 그러나, 그 해 유례없는 위기와 행동이 있었고, 억압 기구로서 국가가 완전히 마비됐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손상되지 않은 채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혁명의 기회는 유실되고 히틀러의 전진이 시작됐다.


따라서, 격변의 시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구체적으로 행동지침을 결정하는 데, '혁명정당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저항의 성공 여부는 수년 간의 단련과 경험을 통해 쌓은 대중적 신뢰와 마르크스주의자들 자신의 정치적 판단력/실행력, 전국적 행동을 조율하고, 이견들을 하나로 모아낼 수 있는 조직 구조를 형성해 놓았느냐라는 전제 위에서 '구체적으로 직면한 상황에 걸맞는 올바른 행동방침을 내놓을 수 있는 판단력과 실행력을 발휘하고 이를 대중 행동에 관철할 수 있느냐'까지 모두 검토돼야 한다.


여기에 우연적 요인들까지 감안한다면 그 판단과 실행의 기민함에 더해 상황 전체를 꿰뚫을 수 있는 통찰력있는 지도자들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느냐, 유연한 행동 보폭을 조직 구조가 감당할 수 있느냐는 문제까지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


이것은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일상적 시기부터 실천을 통해 스스로 검증하고 대중에게 검증받으면서 오류와 실수를 교정해 가며 쌓아야 하는 것이다. 그조차도 결정적인 바로 그 순간에 다시 한번 최종적 시험대에 올라야 하는 것으로 과거가 미래를 완전히 담보할 수 없는 미결정의 영역을 남겨 놓는다.


따라서, <현장노동자>의 서평처럼 추상적이며 종파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패배한 혁명>에 대한 완전한 곡해다 《패배한 혁명》 은 당과 운동의 관계에 대한 변증법적 실천과 판단에 대한 중요한 분석서이자 보고서이다. 우리가 뼛 속 깊이 새겨야 할 또는 절대 반복해서는 안 될 쓰라린 그러나 유익한 교훈들로 가득찬 이 책을 그런 식으로 해독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일상적 냉소와 무기력에서 일순간에 행동으로 도약하는 대중들은 낡은 사회의 때를 한순간에 털어낼 수 없다. 이들은 평상시 가지고 있던 계급내 의식과 경험 수준의 불균형, 모순된 편견 등을 가지고 행동에 돌입한다. 그리고 뒤늦게 행동에 참여한 후진 부위는 대체로 이 낡은 때가 더 많지만 그래서 행동에서 더 성급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적절한 슬로건과 실제 적절한 행동지침을 제시하고 온갖 곳에서 이런 행동을 구체적으로 조직하고 각각의 행동들을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당시 독일에서는 그럼으로써 선진부위와 독일 공산당은 밀착됐을 것이고, 선진부위는 후진부위에 대한 주도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격변의 시기에 대중들은 매우 빨리 정치의 속성을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 자신의 경험"이다.


저자와 <좌익소아병>에서 레닌이 거듭 강조하듯이, 대중의 기대 심리와 환상을 반영한 이런 비판적 지지(협력)과 공동전선 정책은 개량주의 지도자들 자신을 시험대에 오르게 만든다. 필요한 공동행동을 거부한다면 그들 스스로 노동계급의 단결보다 부르주아 정당과 협상을 중요시한다는 것이고, 공동투쟁 계획에 동의한다면 더 많은 대중이 실천에 나서게 되고, 그 대가로 더 많은 접촉면을 통해 신생 공산당과 교류하게 됐을 것이다.


<현장노동자>의 서평 필자는 '진보진영 단결''진보대연합'을 체제를 위해 대중을 속이는 개량주의자들의 기만 행위라 부르고 있다 《패배한 혁명》 에서 독일 공산당이 붕괴한 사민당 정부에 대항해 독립사민당 좌파 정부를 지지하면서 합법 야당으로 활동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을 때, 레닌과 트로츠키, 그리고 책의 저자 크리스 하먼은 적절한 정책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는 구절을 서평의 필자가 읽었는지 궁금하다.


민주노동당을 [아직은 거리감 있는] 급진좌파로 여기는 수백만의 대중들이 사이비 개혁정부와 그 당에서 이탈하고 있다. 다수는 상대적으로 더 진보적인 세력의 집권을 바란다.


그들에게 수동적이나마 정치적 표현체를 제공하고, 지배계급이 위기를 봉합하기 전에 판을 흔들어 정치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것, FTA 반대 운동 등에 기초한 진보연합으로 진보 후보를 유력한 후보로 만드는 것, 이를 통해 진보개혁 정부의 집권을 경험하게 하는 것, 그것은 다음 단계의 진전을 위해 매우 유용한 전술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더 급진적인 정부로 향하는 도정일 수도 있고, 대중 자신이 기대감에 바탕한 대중행동에 나서게 하는 촉매가 될 수도 있다. 그 과정은 쓰라린 급진적 각성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독일에서 1919년에 혁명가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사민당 정부를 지지했던 대중들이 반혁명에 직면해서 그리고 반혁명을 제압하는 데 진지하지 않은 (자신들이 지지했던) 사민당 정부를 지켜 보면서 더 급진적인 정부를 요구하며 일부 지역은 스스로 권력으로 나아가면서 전진했던 경험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우리가 혁명정당이니 나를 따르라’라는 선험적 자기 선언이 아니라 ‘혁명정당이 수행해야 할 임무’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실천이다(2007.6.9)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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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립정부 논쟁과 인민전선주의의 역사

요즘 연립정부 추구 노선이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런 발상의 원조 가운데 하나인 인민전선을 다뤄 보려 한다. 개념에서 인민전선주의는 연립정부 노선과 같지는 않다.

인민전선은 자칭 혁명가들
(스탈린주의 공산당)이 ‘진보적’ 자본가들과 동맹하려고 내놓은 특정한 실천 전략이고, 연립정부는 서로 다른 정치세력이 정권을 연합해 잡는 좀더 일반적인 경우를 가리키는 용어다. DJP 연합도 일종의 연립정부였다. 정치적 실용주의에 입각한 사민주의의 연립정부론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공산당 인민전선과 개혁적 사민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연립정부 노선은 공통점이 더 크다. 계급동맹을 추구하다보니 지지 기반이 되는 노동계급을 일관되게 대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공통점 때문에 자칭 혁명가들이 내놓은 인민전선주의의 사기극 효과가 더 크다. 왜냐하면, 인민전선주의는 처음부터 반자본주의(또는 사회주의) 민중 혁명을 막으려고 고안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걸 위해서 인민전선주의는 체제 분석과 전략에서 단계론(역사적 숙명론)을 도입해 이 교조적 도식을 뛰어넘는 [현실의] 노동계급의 자주적 행동을 억제하며, 동맹을 유지하려고 자본가 친구에게 충성한다.

왜 그런지 이론과 실천의 역사를 통해 검증해 보자.


코민테른유럽 공산당들을 소련의 국경 수비대로 만들다


인민전선주의가 공식적으로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의 국제적 합의이자 당면 이론과 행동지침으로 확정된 것은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였다.

당면한 파시즘과 세계전쟁의 위협에 대비해 평화애호적인 모든 세력과 연합하고 정권에 접근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각주:1]

1936년 5월 코민테른 집행위는 “현재 국면에서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도 역시 평화 유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제국주의 전쟁의 위험에 맞서 노동계급과 모든 근로 민중 그리고 세계의 모든 국민들을 아우르는 광범한 전선을 창출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이 노선을 정당화했다.

이렇게 노선을 변경한 데는 소련 당국의 실질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는데, 이를 파악하려면 시계를 좀더 앞으로 돌려 봐야 한다.

○ 1917년 멘세비즘

인민전선주의 이론과 실천의 직접적 효시는 러시아혁명 당시 멘세비키의 전략과 실천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멘세비키는 러시아 자본주의가 정치·경제적으로 아직 저발전 단계이므로 다가올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 ‘돼야 한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혁명의 주도권과 권력도 부르주아들이 가져가야 했다.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이 목표라는 점에 동조했지만, 어쨌거나 혁명의 주도 세력은 노동계급과 빈농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쟁점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새 시각을 제시한 것은 트로츠키였는데, 그는 세계자본주의 관점에서 러시아자본주의는 이미 세계자본주의의 부분이므로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주의로 곧바로 갈 수 있되, 그것은 국제혁명의 일부일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분석은 달랐지만, 노동계급 주도성이라는 핵심 관점에서 일치했기에 1917년에 둘은 함께 혁명을 이끌었다.


어쨌뜬 이런 도식을 갖고 있던 멘세비키는 1917년 2월에 혁명이 터져 차르 체제가 날라가고 소비에트가 구성됐는데도, 부르주아 야당이 권력이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부르주아들을 설득하려고 애원했다. 애원한 이유는 실질적인 도시 통제력을 노동자소비에트가 가지고 있어서 부르주아들은 임시정부에 실질 권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멘세비키의 좌파인 국제파 수하노프마저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안 된다고 이렇게 말했다.

부르주아지 전체가 일제히 온힘을 다해 차르 체제를 지지하고, 차르 체제와 손잡고 강력한 반혁명 공동전선을 구축할 것이다. 그리되면 중간계급 전체와 언론이 모두 혁명에 반대해서 일어설 것이다. ... 그런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혁명은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현실적 태도가 아니라 혁명의 목표마저 망각하는 재앙적 태도라는 것은 수하노프 자신의 증언에서 드러난다. 러시아혁명은 1차대전이 가한 징집과 전사, 빈곤과 억압 등에 반발한 것이었다. 즉각 전쟁 중지를 선언해야만 국내에서 변혁을 진전시킨 기회가 생기고, 적국의 노동계급을 향한 반전 메시지로 반전 혁명이 확산할 여지가 생길 테다.

그런데 멘세비키 좌파라는 수하노프마저 “혁명의 성공을 위해 부르주아지의 충성과 부르주아 정부에 의존해야한다면 일시적으로 전쟁 반대 구호를 보류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선험적으로 명백했다”고 말한다. 혁명은 왜 한 것일까.

인민전선주의의 국제 수장인 스탈린이 1917년 2월의 시기에 볼세비키 지도부였으면서도 이 멘세비키의 임시정부 지지 입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레닌의 비판에 한동안 동조하지 않았던 것은 적어도 이론의 면에서는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 코민테른 2기의 좌충우돌 후 우선회 시기

1924년 소련 당국은 ‘일국사회주의’ 노선을 선포한다. 1923년 독일 혁명 패배 후 실질적인 국제혁명 전략을 포기한 것이다. 고립된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것인데, 이제 스탈린식 국제주의는 서유럽 등 다른 지역의 공산당들의 목적이 소련의 영토와 체제 안정을 도모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을 뜻했다.

그래서 이 때부터 코민테른은 소련 국내 정책의 대외적 반영, 그리고 대외 정책을 위해 서유럽 공산당들을 통제하고 희생시키는 도구가 됐다. 스탈린 체제가 신경제정책의 성과에 고무돼 일국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부하린과 우파 동맹을 맺고 농민 우대 정책을 펴던 1925~1927년의 시기는 인민전선의 맹아적 시도들이 개시된다.

핵심은 반식민 상태인 중국에서 제국주의와 맞서려면 애국적 자본가와 지식인, 농민, 노동자가 동등하게 동맹해 독립 자본주의 국가를 추구해야 한다는 전략으로 중국공산당을 중국국민당에 예속시킨 것이다.

1925년 영국 제국주의에 맞선 항거가 발전한 상하이 중심의 노동자혁명은 엄청난 사건이었고, 이 혁명이 성장하면서 주도적 구실을 한 공산당도 성장했다. 그런데 지역 군벌과 일부 자본가들을 기반으로 한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이 혁명 덕분에 상하이를 점령할 수 있었으면서 환영하는 노동자들을 오히려 학살했다. 소련 당국은 공산당에게 자신이 군사적으로 후원하는 국민당과 장개석에게 복종하라고 지시한다. 그 대가로 혁명과 중국공산당이 참담하게 파괴됐다.

영-소 노동조합위원회 시도도 영국 노동조합 관료들에게 이용만 당한 채 끝을 맺고 만다. 영국의 개혁 좌파와 동맹해 영국 정부에 압력을 넣는다는 전략이 오히려 개혁 좌파에 비판적인 공산당의 입과 손을 막아 1926년 총파업을 노조 좌파 지도자들이 말아 먹을 때에도 공산당은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다.

다음은 이 시기에 관한 아이작 도이처의 증언이다.

당시에 코민테른은 트로츠키주의 이단자들과 지노비예프주의 이단자들을 뿌리뽑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런 이단자들의 뚜렷한 특징들은 '중간계층과의 동맹'에 대한 '초좌익적'이고 부정적인 태도, 그런 동맹을 맺는 것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태도, 그리고 특히 저발전 국가들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부르주아지가 진보적이고 심지어 혁명적 역할을 수행하는 역사발전의 독립적 단계를 형성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규정되었다.[각주:2]

코민테른은 '동맹'을 무조건 숭배하는 병에 걸린 듯했다. 이런 숭배에 대해 조금이라도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조짐을 보이면 트로츠키주의라는 낙인이 찍혔다. 동맹에 대한 숭배는 두가지 목적에 이바지했다. 소련 안에서 그것은 부하린과 스탈린의 우익적 노선을 정당화해 주었다. 국제적으로 그것은 중국공산당을 국민당에 예속시켜 장개석의 명령을 따르게 만든 소련의 중국 정책을 정당화해 주었다.


○ 1935년 코민테른의 마지막 대회

코민테른은 주인의 명령을 따라 노동계급에 기반한 사회민주주의와 노동계급의 조직과 운동을 파괴하는 파시즘이 똑같은 것이라는 ‘사회파시즘’론을 1928년 내놓았다.

이때는 관료-우파-농민 동맹으로 우선회하던 시기에 성장한 부농이 오히려 관료 권력을 위협하면서 스탈린과 관료들이 농민을 억압하고 농촌을 수탈해 급속한 공업화로 방향을 전환하던 시기다. 강제농장이 시행되고 노동자의 민주적 권리가 파괴됐다.(이른바 국가자본주의 반혁명)

이것은 좌선회로 비춰졌는데, 중국에서 우경적 정책이 파탄난 것을 만회하려고 스탈린은 초좌파 모험주의로 방향을 튼 것이 이런 변화들을 정당화했다.

이런 초좌파 모험주의는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고 공산당이 박살나면서 재앙이 됐고, 이제 나찌 독일의 침략 위협에 직면하게 된 소련 지배자들은 서방 제국주의와 군사동맹을 맺어 독일의 위협을 방지하려 했다.

게다가 3기 초좌익 전술이 실패한 결과, 노동계급 대중의 정서가 단결을 추구하는 정서로 바뀌었다. 그리고 중국과 독일에서 패배한 스탈린주의가 국제 좌익들의 의심을 걷어내고 계속 지배력을 행사하려면 혁명적 좌익들을 말살하고 배제할 필요가 있었다.

인민전선 전략은 바로 이런 배경 속에서 코민테른의 절대 전략으로 제시된 것이다. 소련 방어를 위해 서방 강대국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면 그들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 이제 소련과 우호적일 가능성이 있는 모든 나라에서 공산당들은 자국 지배자들을 겁먹게 하는 행동을 중단해야 했다. 즉 이것은 국제적 차원에서 계급협력을 추구한 것이었다. 그래서 자본주의 반대와 제국주의 반대 모두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다.[각주:3]

그런데 이것은 코민테른 자신을 근본에서 부정한 것이었다. 1919년 코민테른 결성 당시 레닌 등이 작성한 코민테른 가입 조건(‘21개 조항’)에는 공산당과 자본가 정당의 연합 반대가 포함돼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애국주의로 전향한 제2인터내셔널을 대체한 진정한 혁명적 국제주의 제3인터내셔널로서 코민테른의 존재 의의는 이제 사라졌다. 코민테른이 인민전선을 채택한 7차 대회를 마지막으로 활동이 정지됐다 흐지무지 1943년에 해산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1930년대는 세계적 경제 위기 상황에서 노동자 혁명이라는 희망도, 파시즘이라는 위협도, 그리고 세계전쟁이라는 공포도 현실적 문제였다. 인민전선이 집권가능했던 것은 노동 대중이 프랑스의 급진당이나 스페인의 공화연합 같은 당들이 아니라 공산당과 사회당에게 권력을 주고 싶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공산당들은 저항의 열기를 인민전선 전략에 따라 자유주의 자본가당들과 연합해 정권을 잡으면서 통제했다. 대중의 혁명적 열기는 헌정 질서 아래서 선거적 지지로 표현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바로 어제까지 사민주의도 적이라며 겁나게 혁명적인체 하던 공산당에게서 말이다!


노동자운동이 내전 종식 뒤 프롤레타리아 독재 수립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다. ...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가정을 최초로 부정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오직 민주공화국을 수호하고자 하는 염원 때문에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 인민전선 결성 후 스페인공산당 일간지 편집자 헤수스 에르난데스


[스페인] 인민전선 강령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아마도 진지한 사회경제적 요구들이 완전히 빠져 있다는 점이다. ... 강령은 진통제와 같은 성격의 문건, 공화정과 같은 민주주의적 정부만을 위해서 모인 다양한 부문의 광범한 연합을 위해 마련된 것이 분명했다.
― E. H.카

단결 정서에 어느 정도 부합한 대가로 인민전선을 결성한 프랑스 공산당과 스페인 공산당은 성장했다. 스페인 공산당은 서른다섯 배나 커졌다. 그래봐야 다섯 배 성장한 프랑스 공산당의 10분의 1밖에 안 됐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성장은 당 구성에서 중간계급의 비중이 늘어나는 성장이었다. 명백한 좌익적 분위기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정치의 구심력이 사라졌기 때문에 구성의 변화는 당의 성격 변화를 보여 주는 징표로 남고 만다.

목표대로 1935년 5월 프-소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고 7월 프랑스 인민전선 협약이 체결된다. 1936년 4월 총선에서 인민전선이 집권한다. 프랑스 공산당은 각료 참여를 원했지만 배제됐다. 그러나 공산주의자 각료로 자본가들을 놀라게 해선 안 된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인내했다.

스페인 인민전선도 1936년 2월 집권에 성공한다. 이 정당들의 집권 과정과 성적표는 링크한 기사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프랑스 / 프랑스 총파업 / 스페인

이 정당들은 자본주의 헌정 질서를 지키려고 정치적 양극화가 첨예해지는 시기에 양극화의 왼쪽 끝을 억누르는 구실을 자임했다. 어제의 혁명가 당이 오늘의 혁명을 가로막자 내일의 희망이 묘지로 갔다.

1936년 스페인의 반파시즘 혁명과 프랑스의 거대한 점거 총파업 운동이 뒤통수를 맞았다. 대중은 환멸과 사기저하에 빠졌고 자본은 위기를 반동적 방식으로 처리하기로 맘먹었다. 언제나 인민전선 실패의 마지막 희생자는 공산당 자신이었다. 스페인에서 프랑코가 이겼고, 프랑스에선 인민전선 정부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이 쫓겨나고 달라디에 등 우파들이 정권을 파시스트인 비시에게 넘겼다.

여기서 스탈린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영국 등은 나찌 독일을 달래려고 폴란드를 히틀러에게 넘겨줬다. 서방 강대국과 동맹해 히틀러의 군사 위협을 막겠다는 소련의 국제 인민전선 전략이 실패한 것이다. 소련 당국은 금세 입장을 바꿔 1939년 히틀러와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으며 서방 제국주의를 비난한다. 그들이 말하는 평화는 거짓이라는 것이다.(이 말은 맞다.)

그러나 히틀러가 약속을 깨고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 당국은 다시 민주적 제국주의, 진보적 제국주의, 진보적 민주주의 운운하며 국제 차원의 인민전선 정책으로 돌아갔다. 해방 후 조선의 좌파들과 민중운동은 미군을 점령군이 아니라 해방자로 환영하는 결정적 실수를 저지른 배경이다.

이런 타협이 훗날 1970년대 유러코뮤니즘의 “역사적 타협”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1971년에 칠레에서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연합 정부가 들어섰을 때, 인민전선 전략을 견제하는 좌파가 거의 없었다.



실패의 교훈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노선에서 핵심은 혁명의 국제적 확산을 포기하고 ‘사회주의 모국’인 소련을 군사적으로 보호하는 것이었다. 코민테른은 이를 위해 각국 공산당을 동원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그 절정이 인민전선 전략이었다.

특히 나치 독일의 위협이 현실이 되자 히틀러를 막으려고 서방과 맺는 동맹에 집착한 스탈린은 서방 자본가들에게 혁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스탈린은 스페인 내전 초기인 1936년 사회당 소속인 수상 카바예로에게 사유재산 보호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요컨대, 인민전선 전략은 애초부터 그 목표가 체제 위기를 혁명으로 해결할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억제하는 데 있었다. 자본가들에게 혁명을 낚아채고 파괴할 기회를 혁명가들이 제공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잡아야 할 권력을 부르주아에게 양보한 것이니 말이다.

반면에 자본가들은 노동자 혁명을 두려워했다. 그것이 스페인처럼 파시스트 쿠데타에 맞서 공화국 정부를 옹호하려고 시작된 것이었을지라도 그랬다. 자본주의의 근간인 자본주의적 소유권을 건드리지 않는 파시즘이 노동계급 대중에게 총을 주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이들이 술책을 부려 혁명의 주요 타겟을 자신들에게서 돌리고 자신들이 혁명에 올라타 그 목을 죌 수 있다면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엄청나게 힘들고 주도면밀해야 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인민전선에 참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트로이의 목마’다.

결국 공산당의 인민전선주의가 자본가들이 혁명에 올라탈 기회를 줬다. 혁명적 투쟁으로 얻은 신용을 자본가들을 신용보증해주는데 써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인민전선주의는 스탈린주의자들의 술책이기도 했지만, 국제 자본가들의 손바닥 안으로 스스로 기어 들어가서 벌인 술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노동계급 자신의 권력기관으로 기존 국가를 대체해야 한다는 결론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총파업(30년대 프랑스나 70년대 칠레)이나 봉기(30년대 스페인)에 나선 노동자들은 공산당과 사회당이 포함된 인민전선 정부를 자신의 정부로 여겼다는 것이다.

혁명적 위기의 시대에 이런 모순된 의식을 배경으로 한 인민전선 정부의 집권은 혁명적 위기(과 노동자의 자신감)의 고조와 혁명의 방향을 헌정 질서 안에서 투쟁하는 문제(독립적 투쟁 발목 잡기)로 전환하는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내게 마련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국가기구는 혁명가들이 선거로 최상층 부위를 장악한다고 해서 그 계급지배 성격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최근 통치,정치 라는 이름으로 운동과 정치, 투쟁과 집권을 대립시키며 계급협력과 연립정부 참여 노선을 미화하는 개혁주의 경향들[각주:4]이 있는데, 이것은 스스로 국가의 포로가 되는 엘리트 [개혁주의] 정치를 앞으로 목적의식적으로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듯하다.

문제는 좌파들이 반MB야권연대 수준에 갇혀 있으며 투쟁을 억제하니 실제로 대중의 의식 발전도 그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대단한 투쟁이 필요한 인민전선주의가 대중적 지지를 받는 상황이다.

○ 대안적 전략·전술

이처럼 인민전선주의의 본질과 그것이 등장하는 배경의 모순적 성격 때문에 단지 인민전선이 나쁜 것이라고만, 여기에는 다른 의도가 있다고 폭로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세력을 모으고 대안적인 행동을 건설해야 하고, 경험에서 인민전선 전략의 허위를 입증해야 한다. 그것은 계급투쟁 상황, 세력관계, 대중 정서를 모두 감안한 구체성을 띄어야 한다.

인민전선의 대안은 행동을 위한 대중이 인민전선과 독립된 자주적 행동을 유지하면서 투쟁 경험을 의식과 운동을 전진시키도록 돕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30년대에 트로츠키는 노동자 공동전선을 제안했다. 무엇보다 자본가와 혁명가들의 연립정부가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와 공존하는 상황에서 대처했던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 유용하다. 이 승리의 경험이 트로츠키 사상의 원류이기도 하다.

1917년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끌던 볼세비키는 임시정부를 타도하자는 선진노동자들의 때이른 봉기를 억제시키고 [어쨌든 2월 혁명의 성과로 비치고 있는] 임시정부를 입증하는 전술을 썼다. 그들은 카데츠(자본가)-사회혁명당(농민)-멘세비키가 동맹한 임시정부에서 ‘내각의 자본가장관들은 물러나라’라고 요구했다.

임시정부에 대한 환상을 부추기지 않으면서 주적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제 멘세비키는 이 요구에 어떻게 응하냐에 따라 누구를 대변하려 하는지 입증될 것이다. 그리고 볼세비키는 임시정부를 [따라서 소비에트도] 전복하려는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를 막는 데 앞장섰다. 반동에 맞서 임시정부를 군사적으로 방어한 것이다.

이를 통해 볼세비키는 혁명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는 집단으로 인정받아 소비에트의 다수파 지위를 획득하고 봉기를 주도해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인민전선의 본질이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아야 할 때, 자본가들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볼세비키의 이런 접근법은 근본적으로 관점과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라는 원칙과 목표의 문제다.[각주:5]

즉 인민전선주의는 목표와 방법에서 모두 [전략으로서 신념으로서] 마르크수주의에서 이탈한 것이다. 자칭 혁명가들이었던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노동계급의 역사적 잠재력에 관한 신념을 잃고, 국제혁명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관료로서 살아남으려고 이런 국제적 계급협력을 추구했다.

궁극적 지향이 다르기 때문에 현재의 투쟁에 접근하는 법도 다르다. 이정희 대표 같은 야권연대론자들은 한진중공업 투쟁에 유시민이나 정동영을 끌어들이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면, 혁명가들은 평조합원들이 굳건히 대열을 유지해 금속노조의 연대파업을 끌어내길 바란다.

또다른 예를 들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최근 ‘FTA 재협상’을 민주당과 야권 공통 요구로 합의했는데,혁명가들이라면 이따위 요구로 협정을 맺지는 않는다. 진보 양당도 그렇고 진보진영의 기본 견해는 FTA는 원천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가들은 단기적 이익을 위해 야당과 제휴하더라도 필요한 행동, 즉 ‘한나라당의 일방 비준시 저지 행동을 한다’는 식으로 협정을 맺는다. 그리고 독립적 투쟁을 조직한다. 이런 방침은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할 게 하나도 없는 실천 협정이다.


결론

* 자본주의는 단계적으로/점진적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그것은 혁명적으로 전복해야 한다.

* 자본가들은 사회 진보를 위해 동맹할 세력이 되지 못한다. 지배계급의 분열이 성공적인 반란을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혁명의 목표는 지배질서 자체의 전복(사회혁명)이다.

* 인민전선주의의 단어상 목표는 정치혁명이지만 실천은 그조차도 가로막는다. 더 문제는 그 말뿐인 목표조차 사회혁명을 막으려고 제시된 것이라는 점.

* 노동계급의 자주적 행동이 중간계급을 끌어당길 수 있다.

* 절망은 필연이 아니고, 노동자들은 위기의 시대에 스스로 권력을 잡고 사회 변혁에 착수해야 한다.

* 혁명 기회를 놓치면 반동이 찾아 온다. 실패는 늘 혁명과 권력의 기회를 놓치고 양보한 데서 비롯했다.

* 자주적 행동을 고무할 명확한 강령과 전략, 현실적 전술을 실현할 조직과 조직력 필요

* 레닌과 트로츠키가 당면 지침으로 제안한 공동전선은 인민전선과 이렇게 다르다.

(1) 노동계급 정당들의 단결과 협력 ≠ 자본가 정당들과 계급 협력 목표

(2) 특정 목표 성취 위한 실천 협정 ≠ 공통의 선거 강령과 자본가 정부 지지

(3) 이데올로기적 독립성과 비판의 자유 보장 ≠동맹을 무조건 지지하고 미화

(4) 혁명정당 활동의 한 부분 ≠ 인민전선은 코민테른의 전체 전략



○ 자본가들은 권력을 나누는 동맹이 될 수 있는가 ― 스페인의 사례

스페인에서 노동자들이 너무 급진적으로 행동해서 반파시즘 진영이 분열하고 자본가들이 도망간 것이 패인은 아닐까? 스탈린주의자들은 지금도 그렇다고 주장한다.

반파시즘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한 과정을 살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게 드러난다.


파시스트 군대는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나서 정규군에게 무기를 넘겨 받고 지역을 통제하며 저항한 곳에서 패배했다. 내전 초기, 카탈루냐 지방정부 수장 콤파니스는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든 것이 여러분 수중에 있습니다. … 지금의 나와 내 충성심을 믿어 주십시오” 하고 말해야 했다.

반대로 인민전선 정부는 처음부터 동요했다. 노동자들에게 무기 지급하기를 거부하다가 내각이 교체되기도 했다. 인민전선 정부를 지지한다던 자유주의 자본가들은 스스로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보다 차라리 파시스트를 선호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것은 국제적 차원에서도 그랬다.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스페인 공화정부를 지원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민전선 정부를 위해 혁명적 투쟁을 자제하는 것은 자멸의 길일 것이다. 그래서 저들의 주요 책략은 좌파를 인민전선 정부에 포함시켜 발목잡고 뒤통수치는 것이었다.

인민전선 정부는 POUM을 중앙정부에서 쫓아냈고 얼마 안 가 불법화한 뒤 그 지도자 안드레스 닌을 살해했다. 배신의 마지막 희생자는 공산당 자신이었다.

국내 전선에서도 국제전선에서도 노동자들이 자본가를 놀라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본가들의 배신이 노동자들을 놀라게 했다. 자본가들과 단절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사실 다른 모든 곳에서 자본가들의 행동은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자본가들의 이런 태도 때문에 노동자와 농민(농촌 인구의 다수는 사실 농업노동자였다)의 전쟁은 사회혁명으로 나아갔다. 옛 주인들이 파시스트를 피해 떠난 곳에서 이들은 공장과 토지를 접수하고 모든 공공서비스와 치안을 통제했다.

그래서 사회혁명은 이들이 싸워야 할 이유가 됐다.그들에게 선택지는 혁명이냐, 파시즘이냐 둘 뿐이었다. 인민전선 전략은 노동자들에게서 가장 강력한 투쟁의 동력인 사회혁명의 열망을 제거하려 했다.

안타깝게도 스페인은 파시즘과 세계전쟁을 막느냐 아니냐 하는 기로였다. 진지하게 인민전선이 적용된 1930년대 프랑스, 1970년대 칠레에서 같은 비극이 정도만 다르게 반복됐다.


중간계급을 어떻게 획득할까

인민전선주의자들은 중간계급을 획득하려면 자본가와 동맹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이 친자본주의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매판 자본가 vs 나머지 모두의 동맹, 한나라당 vs 나머지 정치세력의 동맹. 이런 게 인민전선주의자들이 기본 도식이다.

중간계급과 동맹하는 것은 혁명적으로 성장한 노동계급에게도 중요한 과제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스로 능력을 제한하는 것은 그 과제를 수행할 수 없게 만든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으로 사회를 개조하는 것이 나머지 대중의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입증할 때만 그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일 가능성이 생긴다.

농민 같은 고전적 중간계급이든 상층 관리자 같은 신흥 중간계급이든 중간계급은 그 분산적 존재조건과 이해관계 때문에 독자적이고 지속적인 조직과 사회변혁강령을 발전시킬 수 없는 존재다.

이들은 양대 계급의 충돌에서 강력한 편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이들이 평소에 친자본주의 성향을 띄는 것은 그것이 지배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또 국가와 민족에 가장 강한 호응과 애착을 보이는 것도 이들이다. 민족국가와 국가관료기구는 그들에게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계급 운동이 계급 협력에 매여 독자적 힘을 최대한 발휘하기 힘들수록 중간계급은 노동계급의 능력을 오히려 불신하게 된다. 반대로 독일처럼 너무 공산당과 노동운동이 분열해 힘을 발휘하지 못해도 같은 효과가 난다.

1917년 러시아에서, 1936년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노동자 투쟁의 잠재력은 중간계급들을 노동계급 쪽으로 끌어당긴 게 분명하다. 이때 중간계급의 공산당 가입이 늘어난 것은 이런 견인력의 방증이다. 노동자 혁명이 경제위기로 파산하는 중간계급들에게 희망을 준다면, 절망적 몸부림인 파시즘이 중간계급에서 대중동원에 성공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공산당이 혁명정치를 포기하고 혁명의 잠재력이 소진하자 당 구성비율 변화는 반대로 국가주의와 애국주의 등 온갖 낡은 사상과 편견, 그리고 인민전선주의를 당내에서 강화시키는 요인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인민전선주의는 노동계급의 발목을 잡아 중간계급마저 반동에게 내주는 정책이다. 



※ 이 글은 한 토론 모임에서 발표한 원고를 토론 내용을 반영해 다시 가다듬은 것이다.
  1. 대회 의장 디미트로프는 스탈린의 하수인 구실을 하던 자인데, 인민전선주의는 능동적으로 지지한 인물이다. [본문으로]
  2. 이 주장들은 최근 국민참여당 등과 가까워지는 진보정당 리더들을 비판하면서 상시적 야권연대와 국참당 진보통합 포함론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비난 말투와 너무 유사하지 않은가. [본문으로]
  3. 당시 인도 공산당의 대표는 인도를 식민 점령하고 있는 영국 제국주의에 관해 단 한마디도 발언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최근 개악된 민주노동당의 강령에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명백히 후퇴한 것을 떠오르게한다. [본문으로]
  4. 이들은 주로 이론적 근거를 베른슈타인과 막스 베버에게서 끌어오는데, 최장집과 박상훈이 대표적 이데올로그로서 심상정, 유시민, 박용진 등이 이 용어법을 자주 사용한다. [본문으로]
  5. 1890년대 프랑스에서 밀랑의 내각 입각을 두고 반대하는 게드파와 조레스파가 논쟁할 때, 입각 지지파를 가능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 자본가 정부에 입각해서도 진보 추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개혁주의자들처럼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을 냉소적이고 현실기권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동자권력의 가능성을 불신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불가능주의자들이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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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해체 이후 미국은 쇠퇴하는 경제적 영향력을 여전히 막강한 군사력으로 만회하는 전략을 추구해 왔다. 세르비아[각주:1],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서 벌인 야만적인 침략 전쟁은 이런 전략의 결과였다.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은 북한의 군사 위협을 과장해 ‘평화’의 유일 관리자를 자임해 왔는데 그 실상은 군사적 대북 압박이었다.

미국은 북한 위협을 빌미로 일본(과 남한의 핵무장)을 묶어 두고, 중국을 견제하고 압박했다. 군사대국들이 밀집한 동북아의 맞춤형 전략인 것이다[각주:2].


양국간 대화든 6자회담이든 매번 약속을 어기고 사태를 악화시킨 것도 미국이었다.

미국은 북핵 위기 시작 이후 제네바 합의(1994)를 이행하지 않았고, 북미공동선언(2000)을 무시했으며, 9ㆍ19 공동선언(2005)은 바로 뒤집었다.
해외 계좌 동결, 북한 선박 임의 검색 등 경제 제재도 강화돼 왔다.

미국은 이미 1950년대에 정전협정을 깨고 남한에 핵무기를 들여 온 적이 있다. 핵을 포함한 대규모 선제공격 훈련을 실시해 온 것도 미국와 남한 정부였다[각주:3]. 1994년에는 전쟁 직전까지 갔다.

이런 군사ㆍ경제적 압박이 북한 정권을 핵과 미사일 개발, 벼랑끝 외교[각주:4]로 내몬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의 군사적 대응을 반제국주의 저항으로 볼 수는 없다.


반제국주의와는 거리가 먼 북한의 군사적 대응

사회주의는 총과 미사일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노동대중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고, 그 핵심 수단은 말과 설득, 그리고 자신의 힘을 민주적적 사회 운영에 발휘하려는 집단적 행동이다. 폭력은 지배자들의 반동적 폭력에 맞서는 방어적 수단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최소성의 기준을 벗어나는 대량살상무기는 사회주의의 방어수단이 될 수 없다.


첫째, 핵은 인류와 환경을 오염하고 파괴하며 폭격 지역의 인간을 절멸시키는 ‘대량살상무기’일 뿐이다.


따라서 방어적 억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변호도 명분이 없다. 약소국의 핵무장은 제국주의 핵 강국들을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든 핵무기를 반대한다.

둘째, 군비 증강으로 강대국에 맞서려면 다른 분야를 희생해 가용 자원을 군사 분야로 최대한 집중시켜야 한다. 이 과정이 3대 세습 같은 권력의 초집중, 비민주적 억압의 강화, 노동계급 삶의 희생을 낳았다.

올해 김정일은 “[인민에게] 흰 쌀밥에 고깃국을 주겠다”고 한 아버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실토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만성 식량부족국가가 돼 버렸다.

그 뒤 국제협상에서 북한의 요구 중 빠지지 않는 게 식량 지원이었는데, 정작 북한 정권의 우선 순위는 군비 증강에 가 있다.

결국 민중의 희생으로 군비를 늘리는 것은 북한 체제의 억압적ㆍ착취적 성격을 드러낼 뿐이다.

셋째, 이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북한은 진정으로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는 나라 안팎에서 모두 대중적 지지를 동원할 수 없다. 사실 북한 정권은 이에 관심도 없다.

대규모 살상무기를 전면에 내세우거나 연평도처럼 군사 보복식으로 대응하면, 표적이 되는 상대 국가(남한)나 제국주의 국가들의 민중에게 지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각주:5]. 남한의 반제국주의 운동이 매번 부딪히는 어려움이다[각주:6].

역설이게도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 시도는 미국 제국주의의 동북아 개입을 정당화하고 일본이 재무장하는 명분을 쌓는 데 이용됐다. 남한 정부와 우익 언론도 이를 국내에서 억압적 조처를 강화하는 데 이용한다.

반대로 체제와 정권이 진정한 개혁을 제공하면서 ‘세계적 반동의 보루’인 미국 제국주의와 맞서는 경우, 나라 안팎에서 진정한 반제국주의 대중 동원을 이룰 수 있다[각주:7].

이것이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제국주의 연합군을 물리친 배경이다[각주:8].


비슷한 예로, 미국은 베네수엘라에서 반(反)차베스 우익 쿠데타를 세 번이나 후원했는데, 이들은 번번이 민중 저항에 직면해 실패했다.

그러나 차베스는 반제국주의ㆍ반자본주의 운동에 지지를 호소[각주:9]하다가도 한편에서 관료와 군부에 의존하고, 중국 같은 비서방 강대국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최근에는 핵개발을 선언했다.

이런 사례는 반제국주의의 진정한 목표가 무엇이 돼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체제의 우선순위


제국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기업 경쟁이 국제적 규모로 확산한 결과다[각주:10]. 호전적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를 바꾸는 일은 자본주의를 바꾸는 일이다.


그러나 북한 정권의 목표는 제국주의 미국에게서 “체제 보장”을 받고 그 질서에 편입하는 것이다. 이것이 (북한의 대응이 반제국주의가 아닌) 넷째 이유다.

김일성은 1994년 전쟁 위기 때 방북한 카터에게 ‘통일 이후에도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한다’고 말했고, 김정일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같은 언급을 김대중에게 전했다.

“철천지 원쑤”의 군대를 통일 후에도 수용한다는 것은 현재의 주둔도 인정한다는 뜻이다. 억압 체제의 안전만 보장된다면 미국이 주도하는 제국주의(=세계자본주의) 질서에 순응할 수 있다는 의사 표시인 것이다.

결국, 내가 말하려는 바는 북한 정권이 대량살상무기에 집착하는 한 진정한 반제국주의 저항을 하는 것이 아니며 미국의 군사 압박을 막는데 도움이 될 정치적 지지를 받기 힘들다는 것이다.

고립은 더 깊어질 뿐이다.
그러나 국가간 경쟁과 축적을 인민의 필요보다 우선시하는 체제와 정권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의 ‘반제국주의 투쟁’이라는 신화를 거부하고 아래로부터 진정한 반제국주의 저항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 이 글은 다듬고 축약해 <레프트21> 47호에 실렸습니다. ☞기사 주소: http://www.left21.com/article/9048


  1. 1999년 나토군을 앞세운 폭격 전쟁. [본문으로]
  2. 북핵 위기 주범설은 완전한 위선인데, 미국은 훨씬 더 파괴력이 큰 핵무기를 1만 6백 기나 보유하고 있다고 하며, 이스라엘 같은 호전적 우익 국가에게는 NPT에 가입하지 않고 핵무기 1백여 기를 보유하는데도 절대 제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지지했다. [본문으로]
  3. 연인원 20만 명이 참가하며 한미 육해공이 모두 [본문으로]
  4. 이른바 벼랑끝 외교가 남한 지배자들의 제국주의 추종 외교보다 자주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본질은 북한 정권이 미국에게 벼량으로 내몰린 상황에 있다. 북한이 능동적으로 벼량으로 간다는 것은 친제국주의 세력과 언론이 한반도 위기 주범을 북한으로 몰고가려는 술책이다. 안타깝게도 진보진영의 자주파는 북한 정권을 미화하려는 의도 때문에 이 술책에 무비판적이다. [본문으로]
  5. 베트남 전쟁 등 여러 사례를 봐도 약소국 민중의 민족해방투쟁이나 제국주의의 간섭에 부딪힌 제3세계의 진보 정권들에게는 제국주의 본국 민중운동의 지지가 매우 중요한 도움이 될 수 있다. [본문으로]
  6. 미국의 대북 압박이 원흉이며 이에 반대하는 것이 우선 과제라고 주장하면, 흔히 남한 민중 전체를 겨누는 북한의 핵무기를 옹호하는 것이냐는 악의적 반론에 부딪히곤 한다. [본문으로]
  7. 북한이 민중을 위해 필요한 개혁을 제공하는 정권이라고 상상해 보자. 미국의 군사적 대북 압박에 저항하는 여론을 이끌어 내고, 저항 운동을 건설하는 일은 매우 쉬워질 것이다. [본문으로]
  8. 러시아혁명이 성공하고 뒤이어 독일에서 제정이 타도되자, 미국·영국·프랑스 등 제국주의 열강들은 14개국 연합군을 꾸려 러시아의 반혁명 백군을 지원하며 혁명 러시아를 침공했다. 만 3년의 내전은 러시아혁명의 조건을 더 어렵게 만들긴 했지만 열악한 무력에도 혁명 러시아의 군대는 말과 설득을 앞세워 승리했다. 전투 전에는 적국 병사들에게 선동 연설과 유인물이 배포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곳곳에서 전투를 거부하는 연합군 병사들이 생겨났다. [본문으로]
  9. 차베스가 2005년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서 ‘21세기 사회주의’를 제창한 것이 한 예다. 당시 연설장소인 체육관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모인(유럽과 우리 같은 아시아 참가자들도 있었지만) 급진적 청년 수만여 명은 차베스의 연설에 열정적인 지지를 보냈다. [본문으로]
  10. 기업주들은 경제적 경쟁자든 아래로부터 저항이든 국내에서 자신의 권력과 이윤에 대한 도전자들에 대처하는 데 국가의 힘을 빌린다. 이들이 국경을 벗어나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때도 마찬가지로 국가의 조력이 필요하다. 약소국에게는 국가를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교역 조건을 강요하고, 선진국끼리 무역분쟁 때도 국가간 경쟁이 촉발된다. 제국주의는 세계자본주의의 오늘날 이름이다. 그래서 진정한 反제국주의는 反자본주의여야 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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