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당
좌파 개혁주의의 위기와 모순
<노동자 연대> 152호 | 발행 2015-07-06 | 입력 2015-07-04
■ 노동당 당대회 이후
[당대회 이후] 좌파 정당으로 남는 것이 노동자 투쟁에 더 낫다
※ 본문의 파란색 문장들은 지면에 없는 부분.
진보재결집을 둘러싼 노동당 논쟁은 노동당 당세 약화가 그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진보신당과 사회당 합당 이후로만 따져도 당권자가 2천 명 넘게 줄었다. 20~30대 청년 당원들이 그 상당수를 차지한다. 당권자 감소 때문에 재정적으로도 어려워졌다.
권태훈 부대표 등은 이것이 진보의 분립·분열로 말미암은 위기의 일부라고 진단한다. 진보 재결집론은 이런 위기의 돌파구로 제안된 것이다.
그러나 좌파가 더 성장하고 광밤위한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노동자 투쟁 수준이 전반적으로 더 높아져야 한다. 돌아보면, 옛 민주노동당의 등장과 성공의 배경에는 1997년 연초 민주노총 파업과 그해 말 경제공황의 후폭풍에 맞서는 만만찮은 투쟁들이 있었다. 그리스 시리자와 스페인 포데모스의 성장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이것이 좌파가 양과 질에서 전혀 성장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노동계급 투쟁만이 이 사회의 지배자들인 자본가들의 이윤에 주된 위협을 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유지할 힘(현 사회를 운영하고 이끄는 생산력을 대표함)을 유일한 집단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경제투쟁일지라도 이윤 창출을 멈추는 투쟁에 참여해 노동 ‘계급’으로서 힘과 연대를 자각하는 경험을 해야 한다. 그럴 때 의식과 자신감을 높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런 배경에서 각종 정치·사회 운동들이 활성화되곤 했다. 수동적으로 사회 상층부가 제공하는 개혁을 선물 받는 것은 계급의 정치의식 향상과 별 연관이 없다.
요컨대, 핵심 과제는 계급투쟁을 활성화하는 데 좌파가 기여할 수 있느냐다.
경제와 지정학의 위기 시대에 계급 간 양극화는 노동운동 안에서도 좌우 정치 양극화를 낳는다. 개혁주의는 체제의 번영을 전제로 개혁을 제공하겠다는 전략이므로 체제의 위기 때는 개혁주의 운동 자체가 지배계급을 도와야 한다는 압력과 기층의 압력 사이에서 동요하는 위기를 겪다가 좌우로 분열하곤 한다.
최근 유럽에서 주류 개혁주의가 심각한 배신을 저지르며 우경화한 것, 이를 비판하며 좌파 개혁주의가 부상하는 것이 그 사례다. 또, 10여년 만에 민주노총에 좌파 지도부가 등장한 것이나, 4·24 총파업 직후에 노동운동의 우파 지도자들이 연이어 배신 행위들을 저지른 것도 이런 운동 내 좌우 양극화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좌파 개혁주의는 기층의 전투적 압력을 더 많이 수용하는 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좌파 개혁주의가 좋은 구실을 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일관되지 않고 기층의 압력 변동에 따라 동요한다는 뜻이다. 한편에선 사회연대전략을 지지하고 우경적 4자 통합을 지지하기도 하지만 지역 연대, 세월호, 최저임금 투쟁 등에서 기여를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전국적 계급 세력균형이 바뀌려면 기층의 전투성이 노동운동 상층의 보수성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결국 좌파의 좌파인 급진 좌파의 임무가 매우 중요하다. 노동계급이 사회 전체에 그래야 하듯이 급진 좌파도 자신의 세력과 유용성을 노동계급 대중에게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2013년 초에 보건노조, 그해 중반에는 전교조, 그해 말에는 철도노조가 전체 운동에 부양력을 제공했다. 그래서 민주노총에 10여년 만에 좌파 지도부가 조합원 직선으로 당선한 것이나, 이 집행부가 총파업을 조직하겠다고 했을 때 기대와 지지를 많이 받은 것도 조직 노동운동에 대한 기대감의 방증이 될 수 있다.
포섭된 노동?
그러나 이런 조직 노동운동의 힘을 고무해야 한다는 점에서 노동당의 좌파 개혁주의 정치는 약점을 보여 왔다. 노동당은 주로 민주노총으로 조직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포섭된 노동”(옛 진보신당)이라고 평가절하하고, “불안정 노동”(옛 사회당)을 새로운 주체로 부각시켰다. 특히, 경제투쟁(주로 임금과 노동조건을 둘러싼 단위 작업장별 투쟁)을 ‘집단 이기주의’라며 폄하해 왔다.
이 때문에 민주노총 좌파 지도부의 등장을 기층 투쟁 활성화에 이용하는 것에도 별 의욕을 안 보였다. 투쟁의 선봉에 서야 할 조직 노동계급의 노동조건 방어에도 뜨듯미지근했다.
일부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노동운동보다 급진적 사회운동을 더 가치 있게 보기도 한다. 이는 장점도 있지만 약점이 더 크다. 생산 현장에 기반한 노동운동과 유리된 사회운동은 사회적 뿌리가 얕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대체로 급속히 떠올랐다가 급속히 가라앉곤 한다. 그러면 일부는 우경화해 노골적인 사회연대전략(국민연금하나로) 같은 포퓰리즘으로 가기도 한다.
요컨대, 노동운동의 급진화를 요구하면서도 그 급진화에 꼭 필요한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흔히 취하는 투쟁 형태(경제투쟁)에는 거리를 두는 모순이 노동당 정치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하고 묻는다면, 리더들이 과거에 가졌던 ‘혁명적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재편하는 전략’을 포기한 것, 즉 모종의 혁명주의에서 좌파 개혁주의로 옮겨 간 정치적 궤적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선거주의나 모종의 포퓰리즘으로 기운 것도 연관 있을 것이다.]
이런 약점 때문에 노동운동 안에 더 넓게 뿌리내리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현재 정치화 수준과 더불어 당세 위기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진보신당에서 노, 심 등이 탈당한 분열 후 급속히 더 어려워진 것도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경시하고 특정한 명망가 의존이 심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당의 리더십 위기와도 연관 있어 보인다.]
예를 들면, 민주노총 4·24 총파업 지지 논평에서 파업 요구의 하나인 공무원연금 개악 문제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노동당 공식 논평에서 박근혜의 ‘공공부문 정상화’에 대한 폭로나 반대를 보기 힘들었다. 공공부문은 대표적인 ‘정규직 고임금 직장’으로 찍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사례로, 전통적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중요 의제로 삼아 온 노동당이 현대차·기아차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단축 투쟁과 그 쟁점에 무관심한 것도 같은 맥락인 듯하다. 이 투쟁들은 공장 안 모든 노동자를 위한 투쟁이며, 각 부품업체 노동자들에게도 큰 파급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실제로 현대차 현장 투사들과 조합원들은 2013년 봄 비공인 파업을 벌이며 투쟁의 잠재력을 보여 줬다.
또한 이 노동자 부분들은 모두 지배자들이 노동계급 전체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기 위해 제압해야 할 중요한 고지로 보는 부분들이다. 좌파가 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외면해서는 다른 투쟁에도 도움되기 어려운 까닭이다. 노동자 투쟁이 아니어도 말이다. 예를 들어, 민주노총 4월 총파업이 정말로 성공적이었다면, 세월호 투쟁에도 힘이 됐을 것이다.
공상적 사회주의
정규직 노동조합의 경제투쟁의 중요성을 무시하며 열악한 비정규직 투쟁이어야만 더 급진적이라는 식으로 보는 것은 장점보다 약점이 많다. 이것은 과학적 전략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도덕주의, 즉 이성과 선한 의지를 앞세워 사회 구성원의 조화와 설득을 추구한 공상적 사회주의(특히, 1858년의 ‘참 사회주의’)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런 정치는 전략, 계급투쟁 등을 경시하는 2000년대 초·중반 자율주의 정치의 유산일 수도 있다.
이런 도덕주의는 노동운동의 약점을 노동자 대중의 현재 의식 수준에서 찾는 데서 주로 비롯하는데, 이런 이데올로기주의적 접근법으로는 ‘이기적인’ 경제투쟁보다는 이데올로기 투쟁(교육과 선전, 선거)을 더 중시하게 된다.
또한 정규직이나 기존의 조직 노동자들의 의식을 낮춰 보는 외관상의 급진성은 실제로는 기회주의를 낳기도 한다. 상층 지도자들의 투쟁 회피주의(관료주의)와 대중의 후진적 의식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을 이데올로기주의의 잣대로 바라보면, 노동운동 안에서 상층과 기층의 이해관계가 꽤 다른 현상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계급 간 중재자를 추구하는 노동운동의 상층 개혁주의 지도층의 입맛에 딱 맞는 사회연대전략(국민연금하나로, 건강보험하나로, 보편증세론 등) 을 옛 진보신당 출신 지도자들 일부가 지지하고 사회당 계열이 분명하게 반대하지 않은 것도 그 사례다.(사회당은 과거에 사회연대전략을 비판했다.) [이것은 노동당과 정의당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지 못한 문제로 볼 수 있다.]
결국 노동당 정치의 수동적 급진성도 경제 침체기 당의 어려움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수동적 급진성에는 물론 노동당의 다양한 정치적 구성도 한몫했을 것이다. 옛 진보신당 지도부는 무지개연합 식의 진보 재구성을 표방해 왔다. 그러나 다양성의 공존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반드시 진보적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에서는 자율주의 관성이, 한편에서는 이른바 ‘당적 질서’가 작동한다. 그 결과, 이질적 구성은 시너지 효과보다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일종의 정치적 “늪”이 되기도 한다. [이런 조직적 요인 때문에 안 그래도 취약한 노동당 리더십 구조를 더 취약해진 것 아닌가 싶다.]
그래서 노동당 내 논쟁은 민주적 토론을 통한 결정과 상호 승복보다는 종종 상호 불신 속에서 징계로 해결되곤 한다. 2012년 대선에서 김순자 후보 지지 당원이 제명된 것이나 지난해 7·30 재보선에서 진보당·노동당의 단일후보가 된 김종철 전 부대표가 징계를 받은 것이 그 사례다.
반제국주의
끝으로, 노동당의 좌파 개혁주의가 제국주의 문제에 큰 의욕이 없는 것도 특별히 지적할 문제다. 최근 강상구 대변인은 <레디앙> 기고에서 이렇게 반성한다.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의 평화 문제[에서] … 진보정당은 2009년 이후 단 한 번도 주요 행위자가 되어 본 적이 없고, 그럴 만한 행위자들을 조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북한의 핵무장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의 일차 원인인 듯이 주장하고(미·중간 제국주의 갈등이 더 선차적 원인이다), 따라서 그 해법도 비핵선언과 남북 적대 청산으로 “한미동맹의 근거를 자연스럽게 소멸”시키자고 주장한다.
이런 공상적 개혁주의의 관점으로는 박근혜 정부와 한미동맹에 일관되게 맞설 수가 없다. 사회당 경향도 제국주의 문제에서는 더 나은 것이 없어 보인다. 여기서도 도덕주의와 평화주의가 현존 제국주의 질서에 대한 과학적이고 혁명적인 이해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총체적 이해와 전략이 부실하면,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간 갈등 속에서 좌파는 끊임없이 진영 논리 그리고/또는 자국 지배계급 지지 압력 사이에서 동요하며 길을 잃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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