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야권 단일 후보로 박원순 변호사가 뽑혀 여론조사 선두를 질주하고 있다.
무소속 박원순후보가 거대 야당인 민주당을 제치고 단일 후보가 된것은 “‘안철수 바람’을 토대로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망,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 정서 등이 맞물리면서 나타난 결과”(<미디어오늘>)로 볼 수 있다.
박원순 후보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과 참여연대 등의 창립을 주도하고, 2000년 총선 낙천·낙선 운동을 비롯해 국가보안법 반대,재벌 개혁,부패 추방 등 권력 감시 운동에 앞장서 온 진보적 NGO의 대표 인사다.
이처럼 기성 정치 바깥에서 진보·개혁적 사회운동 경력을 쌓아 온 박원순 후보의 부상은 ‘제도권’ 정치에 대한 비판이 반한나라·비민주당의 온건 개혁주의로 향하는 최근 경향을 보여 주는 듯하다.
박원순 후보는 후보 수락 연설에서 “제가 만난 시민들의 공통된 요구는 ‘내 삶을 바꿔 달라’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는데, 이는 기성 양당 구조가 전혀 평범한 다수의 삶을 보호하거나 개선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불만을 잘 보여 준다.
이런 불만이 왼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우파 ‘시민후보’로 나섰던 이석연이 박원순 후보와는 대조적으로 “기성정치의 벽을 뚫는데 한계가 있다”며 꾀죄죄하게 중도 사퇴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경제 위기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안철수·박원순 바람이 불면서 한나라당 지지율은 물론이고 민주당과참여당, 친노 정치인들의 지지율이 주춤하거나 추락한 것도 이같은 대중적 반감의 한 사례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위기감이 크다. 대선 전초전이라는 서울시장 선거에 제1야당이 후보를 못 내 체면을 구겼기 때문이다. 당대표 손학규가 사퇴 의사를 밝혔다가 철회했는데,민주당은 손학규 말고는 뚜렷한 대안이 없는 형편이다.
이런 민주당의 위기는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민주당은 부자감세,한미·한EUFTA, 미디어악법 등 중요한 쟁점마다 결정적 순간에 한나라당과 타협하며 반MB대중의 뒤통수를 쳐 왔다.
진보정치
문제는 이런 상황에 진보정치 세력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그동안 진보의 독자적 목소리보다는 민주당과의 협력이나 참여당과의 통합을 더 중시해 왔다. 기성정당 질서에 편입되는 방식에 중점을 둔 것이다.
반대로 진보정치 세력의 단결을 통해 기성 정치와 구분되는 대안을 내놓으려는 노력에는 소홀했다. 그러다 보니, 최근 몇몇 선거에서 선거연합으로 실리를 얻기는 했지만 막상 정치적 존재감은 후퇴했다.
이번 경선에서 민주노동당 최규엽 후보가 기대와 조직력보다 저조한 지지를 받은 것도 진보세력이 분열해 있고 독자적으로 뚜렷한 존재감을 못 드러내는 상황에서 ‘어차피 사퇴할 후보’로 비춰진 것이 가장 컸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좌파도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 후보를 지지하며 진보 염원 청년·대중과 함께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박원순 후보는 “노동3권만큼 중요한 시민권이 어디 있냐”며 노동계급 문제에 우호적이긴 하다.
또 친환경 무상급식, 공공 무상 보육, 고용안정과 청년 실업 해결, 서울시와 산하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과 해고자 복직 등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이를 위해 “토건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보편적 복지 예산을 대폭 확대”하겠다고 했다.
진보진영은 박원순 후보와 이러한 진보적 요구·과제들을 지지하되, 이명박 정부와 우파의 방해를 뚫고 이런 과제들을 실현 가능하게 만들 독립적인 대중행동 건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역겨운 적반하장 검증론
한나라당은 아름다운재단이 재벌 기부 받은 것을 두고 “위선진보”라고 비난한다. 청와대 대통령실장 임태희도 “순수한 나눔이 아니면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우선 ‘도적으로서 완벽한 정권’인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그런 말을 할 자격 자체가 없다.
SLS그룹와 부산 저축은행들의 로비자금이 청와대까지 흘러 들어갔다는 사실이 드러났는데, 이것이“순수한 나눔”인가. 불법 탈세를 저지른 이건희 사면에 앞장선 자들은 또 어느 당이었던가. 이 정부야말로 재벌의 ‘차떼기’후원 대가로 탈세,노조 탄압, 산재 노동자 외면, 감세 혜택을 줘 왔다.
임태희는 “자선사업하는게 대기업의 본분은 아니”라고도 했는데, 기업의 공익 기부는 면세 혜택을받기 때문에 기업들 스스로 이미지 전략으로 활용하는 ‘영리’ 사업일 뿐이다.
오히려 최근 “따뜻한 자본주의”니 “자본주의 4.0”이니 하면서 ‘기부’를 강조하다가 이제 박원순을 비난하는 <조선일보>의 행태가 더 일관성 없고 황당무계하기만 하다.
늘 뒤가 구린대가성 돈을 받아왔던 자들 눈에 세상이 구려 보이는건 똥개 눈에 뭐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한나라당이 박원순 후보를 “청문회 수준으로 검증”하겠다고 했을 때,한 네티즌은 “무조건 봐 주겠다는 뜻”이라고 비웃었다.
사실 한나라당의 속마음은 “좌파 야합 정치쇼”라는 마녀사냥 용어에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당은 2008년 총선에서 개혁 공천하겠다며 박원순 후보를 “전국구 1번자리”인 공천심사위원장으로 영입하려 했다. 김문수가 두 번이나 박 후보를 직접 찾아갔다. 아름다운 재단에는 이명박도 기부한 바 있다. 그냥 자기들끼리 “우파 전향검증쇼”나 하는 게 어떨까.
온정적 개혁주의
우파들의 헛소리와달리 박원순 후보의 정책과 대안은 온정적 개혁주의다.
박원순 후보는 사회적 기업을 통한 복지 제공이 공공복지의 보완 구실을 하며 일자리 창출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좋은 취지와 부분적으로는 현실가능한 정책을 담고 있지만, 경제 위기와 양극화의 진정한 원인 에도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회적 기업도 이윤 논리를 따르는 ‘기업’이므로 돈 없는 복지 소비자인 서민들에게 복지 전달자 구실을 하려면 결국 정부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비용 절감 압력도 피할 수 없다. ‘아름다운 가게’조차 박봉을 감수하는 직원과 무급 자원봉사자들 없이는 유지가 어려운 상태다.
참여연대에서는 정부와 기업에 의존하지 않는 시민운동을 표방해 온 박원순후보가 아름다운재단부터는 정부와 대기업 후원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한편, ‘기업’이 복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의도치 않게 복지의 민영화라는 신자유주의에 부응할위험이 있다.
그래서 보편 복지는 부자 증세로 국가의 복지 재원을 늘리고 제도화하는게 가장 효과적이다. 일자리는 국가의 직접 투자로 공공부문에 복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사회적 기업보다 더 효과적이다.
이것은 재벌에게 “나눔”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친기업 정부·재벌 체제에 맞선 정치적 대중투쟁으로만가능하다.
그런데 박 후보는 “시위는 어차피 사그라지게 되어 있[다]”면서“참여연대 1만5천명 회원이면 간사 50~60명이 지속적으로 사회의 맑은 샘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대중의 주체적 행동을 중시하기보다는 대중을 공익적 엘리트들의 수동적 후원자로 여기는 것이다.
한편, 사회적 기업 방식의 허약함은 이명박이 아름다운재단의 파트너인 하나은행과 미소금융을 하면서 아름다운재단의 마이크로크레딧(서민소액저리대출) 사업이 파탄난 데서도 드러난다.
박 후보는 “시민운동을 적처럼 대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이명박 정부는 미소금융 사례에서 보듯 최근 시민운동이 중요시해온 협치를 곳곳에서 파괴했다.
그 결과, 시민운동도 정치세력화해야 한다는 정서가 생겼는데, 그 대표주자가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처장의 빅텐트론이다. 박원순 후보의 출마도 이 연장선에 있다고 보는데, 이는 빅텐트론에서 보듯 여전히 민주당 의존성을 버리진 못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박원순 후보로 모아진 기대감과 정치적 긴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박 후보가 내세우고 힘겨운 서민과 청년들이 공감하는 소박한 이상조차도 민주당과의 공동정부에 의존하는 방식보다는 독립적인 대중행동에 바탕해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 이 글은 일부 축약해 <레프트21> 66호에 실렸습니다. ☞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