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선생은 맑스주의의 여성해방론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건가? 여성억압이 자본주의보다 오래 됐다는 게 맑스주의자들에게 왜 죄송한 얘기인지? 계급 발생과 함께 여성억압이 생겨났다는 얘기를 세계에서 거의 가장 먼저 얘기한 인간들 무리에 드는 것이 엥겔스인데. 그리고 그 분석은 여성차별이 인류의 모든 역사에 나타나는 속성이 아니고, 특수한 사회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임을 밝혀 냄으로써 여성해방 운동에 크게 기여한 것인데 말이다.
마트 노동자 임금 비교도 마찬가지다. 예로 든 임금 차이는 관리자와 하급 노동자와의 격차 문제가 더 본질적인 것이다. 가령 관리자와 캐셔 노동자의 성별을 바꿔 놓고 대입해 보자. 그때도 캐셔 남성이 관리자 여성보다 임금을 더 받을까? 박근혜가 대통령으로서 여성은 물론이고 남성 노동자들을 개 돼지 취급하는 현실에서 너무 무력한 비유 아닌가?
간단한 문제를 도식적으로 보느라고 엉뚱한 사례로 반론을 하니 답답하다. 남성 노동자가 사소한 득을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게 필연적이라고 말하긴 어렵다고 본다.
사실 한달 반쯤 전에 박노자 선생이 퀴퍼 주최측의 노동자연대 부스 불허 입장을 비판한 글을 보고, 참 간만에 분별있는 글을 썼다고 생각했고, 그가 자기 지지자들에게 공격받는 걸 보면서, 허, 이 양반 조만간 자기 지지자들에게 결백을 증명하려고 뜬금없이 노동자연대 까는 글 또 하나 쓰겠구만 하고 생각했다. 좋은 글을 보고 걱정부터 앞서야 하는 현실이 애석하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문제가 많은 글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먼저 예로 든 노동 문제에서 더 따져 봐야 할 문제는 사실 더 복잡하다.
'관리자'를 사용자 개념으로 본다면, 오히려 성별은 거의 부차적이 된다. 서로 다른 계급 간의 비교에선 성별이 아니라 계급이 압도적 규정력을 발휘하는 건 너무 명백하기 때문이다. 사용자나 중간계급 관리자와 하급 노동자의 문제라면, 그 두 자리에 성별을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대입해 봐도 노사 관계가 훨씬 더 규정적인 쟁점이다.
하층계급에서 사용자가 된 관리자라면 이런 경우는 남성이 더 많기 때문에 남성 공모설도 유력해 보이긴 한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 위치를 차지하는 경쟁에서 남성과도 경쟁해야 했다는 점,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점을 남성공모설이 설명하기는 힘들다.
관리자를 임금노동자 수준에서 한 과장급 정도와 비정규직 현장 노동자의 관계로 사례를 삼을 때도 그것은 고참과 하급,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로도 해석될 수 있다. 정규직은 죄다 남성이고, 비정규직은 죄다 여성인 그런 현실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허구의 현실에서 뽑아낸 담론으로 무엇을 단죄하려 하는 것이지?
만약에 같은 직종의 같은 직급에서 남녀간 임금 격차가 있다면 그것 또한 여성차별 쟁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형식적 임금체계에선 그렇지 않은 기업들도 많기 때문에 그런 방식이 이 사회이 여성차별이 전부 그런 형식인 것처럼 말하기에는 조심스럽다. 다만 왜 같은 노동자 안에서 남성노동자가 채용과 승진에서 더 유리할까 하는 문제에서는 좀더 세밀하고 다뤄야 할 쟁점이 될 수 있다.
최근 공기업 채용에서 여성비율 낮은 게 드러났다. 명백히 여성차별이다. 솔직히 성적 기준을 어떻게 잡냐에 따라 남자 지원자 일부가 운 좋게 득을 봤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제조차도 과연 이것이 공모의 결과인가? 그것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여전히 많은 남성이 함께 탈락했는데. 이것이 '성별' 공모일까? 사용자들의 구조적 편견이나 인력 정책이 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정권에서 여성들에게 강요되는 ‘일과 가정의 양립’은 정규직 풀타임보다 시간제 일자로 더 내미는 경향이 있다.
마트의 캐셔나 학교 급식 같은 부문의 사례는 여성(특히 기혼여성)이 몰려 있는 관료적 위계체제에서 하급에 있는 직종이다. 그래서 여성차별과 노사간 위계가 중첩되기 쉽고 그래서 헷갈리기 쉬운데, 우리는 두 요소를 균형있게 봐야 한다. 어느 성별이 관리자라도 갈등이 있기 쉽고 종속적 관계를 강요하는 압력은 성별이 아니라 사내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관리자가 남성일 때는 여성에 대한 억압적 편견이 언행만이 아니라 임금이나 노동조건의 문제로도 표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히려 눈을 사회 전체로 돌려서 왜 여성들이 그런 처우가 열악한 직종에 일하게 됐는지 따질 수 있다. 사실 그래야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사회 전체에서 남편을 관리자 지위에 둔 여성들이 예로 든 저임금 일자리에 올 확률이 거의 없음을 안다. 반대로 저임금 일자리에 속한 여성의 가족(남편, 부모, 자식 등)은 여성의 고용조건과 임금이 상승되길 기대할 것이다. 이를 젠더나 성별의 정치로는 설명할 수 없다.(구체적 삶의 현실을 외면한 관념성)
대강 거칠게 살펴 봤지만, 이처럼 여성 노동의 경우 계급 문제를 사상하고는 그 무엇도 설명하기 힘든 것은 명백하다. 남성은 정규직이고, 여성은 비정규직인 그런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박노자 선생은 지배자들이 분리통치를 위해 여성을 남성보다 더 과도착취한다는데. 나는 자본가들이 왜 그래야 하느냐고 되묻고 싶다. 가령 모든 노동자가 2백만 원을 받아야 하는데, 여성 1백만 원, 남성 3백만 원을 줬다면, 지배자(자본가?)들은 뭘 얻은 것일까? 남성을 종범으로 만들어서 얻는 경제적 이익은 어딨는가? 경제적 이익이 없다면, 자본가들은 왜 분리통치를 하려 하는가? 남녀 분열을 위해 남녀 분열을 시키는건가?
그래도 피지배 집단이 분열되면 낫지 않느냐고? 지배를 위협하지 않으니까? 결국 줘야 할 걸 다 주는데, 지배의 실익은 어디에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그렇다면, 지배자들이 여성몫을 빼앗아 남성몫을 채워준다는 가정이 틀렸다는 것이고, 기껏해야 여성이 더 착취당하고 남성이 좀 덜 착취당한다는 가설 밖에는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둘다 자본가에게 착취를 당하는 데 ‘더’와 ‘덜’의 책임이 서로에게 겨눠져야 하는가? 이런 양성 갈등이 구조적이라면, 박노자 선생은 남과 여 노동자 모두 자력 해방의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는 셈이다. 남성과 일부 여성은 여성억압을 계속 지지할 것이기 때문이고, 더더욱 차별의식과 편견, 관행, 습성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차별이 이익이라고 좌파까지 얘기해 주는 걸?)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차별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없다고 말할 순 없다. 이런 현실이 양성 단결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런 편견을 극복할 계기로서 남녀/여남 노동자들이 함께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는 사회 구조, 즉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할 대중투쟁의 중요성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고 개입하는 사회주의 정치 조직의 문제를 제기한다. 역사에서는 이런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는 수많은 사례들로 가득하다. 단결 가능성을 부정하는 종류의 페미니즘으로는 이런 일을 성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를 한다.
한편, 박근혜가 이명박 등에게 '애도 안 낳아 본 여자'란 식으로 모욕당한 것에서도 계급과 무관하게 ‘발화’되는 여성차별 담론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 담론 자체도 여성차별과 무관하지는 않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박근혜가 객관적으로 억압 당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둘째. 아무리 1970년대 이후 페미니즘 성장에서 反맑스주의적 맥락이 중요했다 쳐도, (나도 조선공산당에 대해 평균 이상이 결코 아니기에 조심스럽지만) 조공의 여성 활동가들을 남성 지도자들과의 파트너 관계 때문에만 지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만 말하는 것은 적절한가?
맑스주의를 까려고 역사 속의 여성 운동가들의 훌륭한 구실을 무시하는 것도 모순처럼 보이고, 정희진이 맑스주의는 백인 남성들만의 것이라고 강변하는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꽤 위험한 주장을 하면서도 상관관계가 왜 인과관계가 되는지에 관해 개연성 있는 설명이 전혀 없다. 그냥 이른바 페미니즘의 가설일 뿐인 것이 검토된(입증된) 결론처럼 제시될 뿐이다.
또한 운동 안에서 설사 개인의 문제들이 있다 해도 그것이 일탈인지, 이념의 필연적 귀결인지, 운동 내 지배계급 내 관행이 묻어 들어온 것인지 등 그 이념과 운동 자체에 대한 평가로 곧바로 가서는 안 되고 늘 구분해서 봐야 한다. 그것은 정희진 때문에 모든 페미니스트들을 反평화주의자로 취급하는 것이 부당한 것과 마찬가지다.
조선공산당 사례에서나 글 전반에서 박노자 선생이 강조하는 것은 남성들이 득을 보고, 자본가들의 종범이 되고 당대에 가장 해방적 인식을 갖춘 사람들에게서도 차별적 남녀 구분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공간을 초월해 남성이 여성억압을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당대에 가장 선진적 여성들조차 그런 종속적 지위를 감내했다는 식의 묘사는 사실은 여성해방,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가능성을 삭제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남성, 심지어 여성들의 일부조차 여성억압적 구조에 안주하고 거기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면, 도대체 그 해방은 어떻게 가능하며, 가능하더라도 자기해방의 과정일 수 있을까?
셋째, 여성 노동의 현실에 대해 다루는 토론으로 가면 적어도 맑스주의자들이나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이나 불화 속에서도 각자 전진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은 덧붙이고 싶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현실에 대한 (실제로는 임의로 재구성한) '담론'만 난무한다. 사실 박노자 선생이 인용한 관리자-비정규직 사례도 마찬가지다. 저 사례가 어떤 종파적 비정규직 운동가에게 가면,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착취하는 것의 사례로 된다. 그것이 페미니스트들에게 가면,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는 것의 증거가 되고 말이다. 머시 진실인가?
비정규직 중에 여성 비율이 10퍼센트 더 높다는 것이 여성=비정규직=사회적약자=소수자 식의 정리를 정당화하는가? 그런 식의 도식은 현실의 검증을 버틸 수 있는가? 그렇게 보면, 이 사회적 약자들 중 남성은 어디로 사라지는가? 비정규직 남성, 동성애자 남성은 젠더적으로 여성인가? 이런 차별 문제가 젠더 정치의 문제로 단순히 해소될 수 있는가? 사회적 약자의 단결은 어떤 객관적 근거로 사회적 강자들을 이길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설득력 있는 근거들이 제출되고 있는가? 그냥 정규직 남성 비난하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가? 아니면 앙상한 개인들의 의식 개조만이 결국은 남는 해법인가? 그 개조는 누가 어떤 힘(계기)로 가능한가?
내 주장은 이중삼중의 굴레를 겪는 여성의 문제를 격하하는 게 아니라, 계급 문제를 기각하는 종류의 페미니즘 틀로는 종합적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진술이 불쾌하겠지만, 현실의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걸 종합적으로 설명해야 하고, 또 그러려면 중심적 요인이 무엇인지 밝혀내야 한다. 그 다양한 요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먹고 사는 문제로 인간 집단이 분단된 문제, 즉 계급 문제가 가장 현 사회의 모순에 대한 규정력이 크다는 것이 맑스주의의 기본적인 주장이다.
이러 관점에서 보면, 정작 (생물학적 성이든, 젠더에 관한 의식의 문제든) 환원론에 매달리는 건 일부 페미니스트 본인들이다. 최근의 논쟁들을 보면, 담론을 중시하고 객관을 거부한 포스트맑스주의 류가 맑스주의를 경제환원론, 계급일원론으로 부당하게 매도한 게 떠오르는데, 그런 식의 곡해가 페미니즘의 위상을 높일 수 있을리 만무하다.
박노자 선생이 노동자연대를 취급하는 방식도 이런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선생은 적어도 트로츠키주의가 스탈린 체제의 유산과는 다르다는 걸 알 정도 수준은 되지 않는가? 스탈린주의 체제에도 일말의 진보성이 있다고 하던 양반이 스탈린주의 체제의 구조적 여성 억압을 누구보다 먼저 지적하고 비판한 전통에 대해서는 이토록 멸시를 갖고 대하는 것이 우습다.
스탈린주의 체제에 대한 반감(그것을 맑스주의의 전형으로 오해하고서)이 페미니즘의 反맑스주의 맥락의 핵심임을 감안하면 박노자 선생의 이율배반적 태도는 아이러니하고 정희진의 反맑스주의적 억지와 무엇이 다른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박노자 선생의 페미니즘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인가?
분맂주의 페미니즘이나 정체성 정치는 각각의 억압에 각각의 해결책이 있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사회의 전반적 변혁과 여성차별 해결이 별개라는 주장이다. 바로 이것이 바로 맑스주의자들의 총체성 개념과 충돌하는 부분이다. 맑스주의자가 보기에 이는 전형적인 개혁주의다. 체제 안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해결하겠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계급과 혁명에 대한 담론에 이런 종류의 페미니스트들이 그토록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이, 나는 개혁주의자들이 내비치는 거부감과 별로 구분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인다.
자본주의 문제와 여성 문제는 별개라는 논리로 '구라파' 페미니스트들 다수가 짐 싸서 개혁주의 정당들로 찾아갔지만, '머시 중허게' 달라졌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구라파'를 문명의 요람처럼 여기는 오리엔탈리스트들이 아니니 더욱 그렇다. 이 문단을 누구는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맑스주의자들의 의심과 비판에도 나름의 역사적 근거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게급적 단결로 자본주의에 맞서 여성해방도 쟁취하자는 전략과 분리주의 등 페미니즘 전략은 명백히 차이가 있다. 문제는 차이가 아니라 더 건설적인 쟁점으로 그 차이를 활용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하지 않고, 실재와 담론을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자신들만의 주관주의에 입각한 반젠더성 재판극을 벌이며 도덕적 비난의 합창을 만들어 내려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자기 지지자들에게 反지성주의를 고무하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우스운 희극에 맑스주의자들이 의기소침해져 고꾸라진다면, 그것은 역사적 비극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적어도 그 재판극의 판사가 공정하다는 건 역사의 검증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네, 대단히 아쉬운 말씀이지만, 남성들은 여성차별로 득은 봅니다. 막대한 득을 봅니다. 저를 포함해서 그렇습니다. 여성차별은 가부장제적 자본주의의 한 특징인 만큼, 즉 여성차별과 계급적 불평등이 많은 면에서 중첩되고 일치되는 만큼, 여성차별은 남-녀를 분리통치케 하고 피착취 계급의 남성들마저도 지배자들의 종범으로 만드는 경우들은 종종 있습니다. 이 체제 유지의 한 비법이죠. 대부분이 여성인 마트 비정규직의 임금이 100만원을 넘지 못하는데, 대부분이 남성인 관리자들의 임금이 그것보다 2-3배나 된다면, 분명 생산 위계 체제에서 보다 높은 위치를 점하는 남성이 여성에 대한 과도착취로 얻어지는 잉여 덕에 그만큼 본인은 초착취를 면할 수 있다는 말씀이죠. 둘 다 착취 받지만, 착취의 정도상 본질적 차이가 있죠. 참, 제가 비교적 잘 아는 대학에서도, 늘상 보면 관리자인 "실세" 교수는 남성인 경우가 많고 시간강사 등 중에서는 여성의 비중은 (전임들의 사회에서의 여성 비율보다는) 높았습니다. 시간강사의 100만원도 안되는 박봉은 전임들의 5-6백만원 고액봉급이 가능하게 만든 원천인데...여성차별적 측면이 강한 비정규직 착취로 관리자측이 득을 좀 보죠. 아무래도요. 이것 다 자본의 분리통치 전략이다 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전략은 적어도 남성들에게 아주 잘 먹혀들어가죠.....
죄송한 말씀이지만, 여성차별은 자본주의보다 좀 오래됐습니다. 적어도 청동기 초기까지 거슬러올라가죠. 계급사회 초기로요. 그리고 여성차별의 혐의로부터 진보/혁명 조직들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만큼 여성차별의 폐습은 남성 사회에서 "규준화"돼 있으니까요. 식민지 시대에 조선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부인해방론자는 바로 공산주의자들이었는데, 그들 사이에서도 보면 상급의 여성 활동가들 -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 박원희, 박차정 등 - 은 대체로 바로 남성 지도자들 (임원근, 박헌영, 김단야, 김사국, 김원봉 등)의 처/애인이었습니다. 다들 훌륭하신 분들이었지만...제 말은, 남성과의 '관계'야말로 그 때도 혁명조직 안에서도 여성에게 "지위"를 부여할 수 있는 주된 원천이었죠. 공산주의야말로 여성해방의 전제라 할 수 있지만, 공산주의 남성들이 진정한 페미니스트로 인간개조될 때까지 그들도 상당히 긴 기간동안 교양을 받아야 하고 여성운동가의 투쟁 대상이 돼야 합니당....좌우간, 여성차별은 단순히 "부차적 문제"로 보려는 상식 이하의 시각은 좀 지양돼야 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