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공습 반대 주장은 옳지만 구체적 대안도 제시해야

리비아 혁명에 대한 <레프트21>의 주장은 극단적 소수파적 주장이다. 하지만 이 주장이 옳은 주장이었음이 시시각각 드러나고 있다. <한겨레>, <경향신문>과 같은 언론들은 폭격이 시작됐을 때 이를 지지했다. 그러다 점점 서방 세력의 실체(민간인 사망, 아랍 세력의 냉대, 반제국주의 여론 확산)가 드러나자 은근슬쩍 군사 개입이 잘못됐다는 식의 기사를 쓰고 있다. <레프트21>만큼 시종일관 서방의 개입을 반대한 곳은 없어서 매우 반가웠다.

다만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구체적 대안 제시가 없었다는 거다. 서방의 리비아 공습은 잘못된 것이지만, 궁지에 몰린 리비아 혁명 세력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공습 이외의 대안이 무엇인지 제시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주장에도 더 힘이 실린다.

나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 대안'들을 생각해 봤다. ‘서방은 군사공습하지 말고 동결한 카다피의 재산을 혁명 세력에 넘겨라’, ‘즉각 카다피와 모든 외교관계를 철회하고, 자국의 리비아 대사를 추방하라’, ‘혁명 세력이 승리할 때까지 리비아산 석유에 대한 거래를 즉각 중단하라’ 등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리비아 공습 잘못된 것 아니냐’ 하고 주장할 때마다 벽에 부딪혔다. ‘넌 카다피를 옹호하는 거냐’는 반응 때문이었다.

카다피도, 제국주의도 모두 거부하는 입장임을 명확히 보이려면 카다피를 혁명가로 착각하는 다른 좌파연하는 세력과 다르게 구체적인 주장을 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리비아 혁명을 지지하고 리비아 혁명에 대한 서방의 개입에 반대하는 <레프트21>의 주장에 공감하는 정원석 씨의 독자편지가 매우 반가웠다.

정원석 씨의 말대로 리비아에 대한 서방 개입에 반대하는 주장은 아직 상대적 소수파다. 그것은 그 주장의 근거나 명분이 취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역겹게도 서방 열강이 리비아 혁명에 도움을 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리비아 혁명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서방 개입 찬성론자들은 반대자 모두를 카다피 지지자로 쉽게 몰아세울 수 있다.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위원이 3월 31일에 <경향신문>에 쓴 칼럼에서 그렇게 했다.

그는 서방 개입 반대론을 비판하면서, 리비아 민중 항쟁을 사실상 지지하지 않으면서 서방의 리비아 개입에 반대하는 자주계열 활동가들의 논리(민주노동당 논평)를 비판하면서,  싸잡아 비판했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집회까지 열면서 서방의 군사 개입 반대 활동을 주도하는 곳은 다함께나 사회진보연대처럼 반카다피 혁명 세력을 지지하는 급진 좌파들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카다피에 반대하고 민중 항쟁이 성공적인 혁명으로 발전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제국주의의 중동 개입에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정원석 씨의 글을 보면서 <레프트21>이 어느 정도 이 과제를 잘 수행한 듯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정원석 씨는 ‘서방의 군사 개입이냐, 카다피 지지냐’ 하는 왜곡된 이분법을 깨려면 리비아 혁명 과정에 서방 개입이 아닌 [혁명 지원을 위한] 구체적 대안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한다.

그런데 <레프트21>은 다양한 기사들에서 이미 대안들을 제시해 왔다.

가령, 정원석 씨는 카다피의 재산을 동결해 혁명세력에게 넘기라는 주장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레프트21> 53호 1면 기사 ‘리비아 폭격을 중단하라 – 아랍 혁명에 승리를’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기사에서도 지적했듯이 이런 일을 해야 할 주체는 서방 국가들인데,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할 세력이 아니라는 점도 봐야 한다. 서방의 리비아 개입 목적은 혁명의 성공이 아니라, 석유 통제권과 중동 반란 확산 저지에 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구체적 대안’은 혁명 과정을 더 심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반카다피 혁명 세력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즉각 개선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요구와 이를 위한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반카다피 세력이 더 많은 리비아 민중의 지지를 확보해 카다피와의 투쟁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리비아를 건설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정원석 씨는 ‘혁명 세력이 승리할 때까지 리비아산 석유에 대한 거래를 즉각 중단하라’는 요구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단서를 달아 지지할 수 있을 것 같다.

혁명 세력이 장악한 유전지대에서 석유 판매 대금은 당분간 혁명 자금과 사회개혁을 위한 재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원석 씨의 문제제기에 대한 더 자세한 답변은 이 주제와 관련한 <레프트21>의 최근 기사들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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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울산시당이 <경향신문> 사실상의 절독 선언을 했다[각주:1]. 진보정당과 개혁 언론의 충돌은 흔한 일이 아니다.

발단은 <경향신문> 10월 1일자 사설이다. 이 사설은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면서, 이를 비판하지 않는 민주노동당도 함께 비판했다. 민주노동당은 그 직전 외부에서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3대 세습을 비판할 수 없다고 논평한 바 있다.

북한은 자본주의 계급사회

북한 지배계급은 수십 년 만에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의를 열어[각주:2] 김정일의 3남으로 알려진 김정은을 초고속 승진시켰다. 김정은은 북한군의 대장과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임명됐다. 군 경력도 없고 서른도 안 된 인물이 사실상 최고 권력자의 지위 승계를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북한 체제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회주의는 원리상 단지 몇 년에 한 번 대통령을 뽑는 자본주의의 민주주의와는 비교할 수 없이 민주적이다. 정치는 경제적 결정을 다루는 과정이 될 것이고,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고 소비할지는 자유로운 대중들이 협력적으로 수요를 조사하고 토론하며 투표를 거쳐 결정할 것이다.

이런 권리들이 설사 외부적 요인으로 일시적으로 제약되더라도, 말그대로 그 제약이 일시적이어야 하며, 그것을 보장할 최소한의 기초적 권력은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북한은 사회적 지위에 따라 부와 권력이 애초에 불평등하게 배분돼 고착화된 사회다. 최고 지도자 지위의 세습은 두드러진 한 사례일 뿐이다.

명백한 계급사회인 것이다. 어떤 계급사회일까? 북한 경제는 국경 밖 자본이나 군사력과 벌이는 경쟁이 경제의 우선순위와 형태를 강제한다는 점에서 원리상 자본주의다. 폐쇄적 국가‘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체제는 핵과 인공위성, 중공업 같은 경쟁과 자본 축적의 필요가 인민의 배고픔보다 우선시된다.

이들 국가자본주의 경제는 한때 유행하고 성공하기도 했다. 그래서 북한은 1970년대 후반까지 남한보다 더 빨리 성장했고, 1980년대 초반까지는 남한보다 더 잘 산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체제도 서방의 시장자본주의 경제와 마찬가지로[각주:3] 자본주의에 생래적인 주기적 경제위기를 겪어 왔다. 1980년대 후반부터 취약해진 북한 경제의 경쟁력은 옛 소련의 붕괴 후 역내 시장마저 잃어버리면서 더욱 약화됐다. 대홍수로 식량 기근까지 겹친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 경제는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가 볼 때, 김정은 권력 승계는 북한 지배계급의 호언장담과 달리 북한 체제가  지속적인 위기 상태라는 걸 보여주는 사건이다. 북한 지배계급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권위, 일당 체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그나마 경제와 생활수준이 성장하던 시기에 최고지도자였던 김일성 ‘주석’의 후광 뿐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것이 김정일이 주석 자리를 공석으로 둔 채 ‘유훈 통치’를 한 배경인데, 그 방식을 유지하려니 검증된 지도력이 아니라 그 혈통과 군부의 지지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선군(先軍)정치는 이번에도 강조됐다. 물리적 억압력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번 당 대표자회는 이 때문에 조선노동당 규약도 손 봐야 했는데, 공산주의 등 명목상
용어 대신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혁명전통'을 공식화하고, 그에 대한 '계승성'을 강조”했고 “선군(先軍)혁명이 추가됐다.[각주:4]

주체 혁명은 이제 권력세습과 군부를 앞세운 선군정치를 뜻하는 것이 됐다.



북한 비난하는 남한 지배자들의 위선

이것을 한국의 우파들은 김씨 왕조의 권력 세습이라고 비판했는데, 이것은 매우 위선적인 상징 조작이다. 

북한을 봉건왕조로 묘사하는 것은 남한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북한 ‘사회주의’(진실은 가짜 사회주의)보다 근본에서 더 우월한 체제라는 것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개인 왕조 체제인 것도 아니다. 북한은 관료적 자본가들의 집단 지배체제다[각주:5]

북한 모델이 진보적 대안 사회가 결코 될 수 없지만, 우파의 북한 비판과 선을 그어야 하는 이유다. 이 점을 혼동한 많은 좌파들이 냉전시대에 반공주의로 전향했다[각주:6]

그러나 권력과 부의 세습이란 점에서 남북이 다르지 않다. 대표 사례인 <조선일보>와 삼성재벌의 세습은 그것이 일개 기업이나 돈 더미 정도가 아니라 한국 사회 주류 중의 주류로서 보유한 권력까지 세습된다[각주:7]는 점에서 북한과 다르지 않다.

몇 년에 한 번 투표권이 있으며, 그나마 뽑힌 뒤 별 헛짓거리를 하고 다니는데도 어떻게 할 수 없이 임기 채우기만 기다려야 하는 자유민주주의도 허술하고 비민주적이긴 마찬가지다.

남한도 진정한 권력은 세습되고 있다. 진정한 통일과 남북 닮아가기는 남북 고위층에서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두 사회가 자본주의적 계급 사회라는 공통점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양쪽 지배자들이 서로 상대 존재를 핑계로 내부 불만을 잠재워온 적대적 공생관계의 역사는 바로 지배계급이라는 공통적 속성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한국 사회 주류의 비판은 반박꺼리일 뿐 진지한 고려 대상이 아니다[각주:8]그렇다면, 진보진영 안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접근법 문제인데, 이 점에선 일단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논평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진보의 대안 될 수 없어

진보와 좌파의 보편적 기준에 북한의 권력 승계(외교적으로 좋게 표현하면)는 당연한 비판 대상이다. 무엇보다 그런 행위를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한다면 지나칠 수 없다. 좌파의 신용이 걸린 문제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다수 대중의 진정한 이익과 의견 참여가 반영되는 체제가 진보진영에서 대강 합의 가능한 대안적 민주주의의 모습이라면, 북한의 권력 체제가 이를 봉쇄하고 억압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논평에서 좀더 세련되게 내재적 접근론과 남복관계 고려론을 펴는데, 여기에 비판받을 대목이 있다. 우선 오직 북한 정권의 문제에 대해서만 내재적 접근론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북한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라는 논평은 사실상 북한 체제의 비진보성에 눈 감겠다는 선언이다. 권력과 부의
세습이나 비민주성을 비판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안에서 체제 비판을 할 때 일관성의 문제가 생긴다. 삼성과 <조선일보>의 세습이 좋은 사례다. 한편, 국제적으로 제국주의를 비판할 때도 일관성 문제가 제기된다. 그들에게도 내재적 접근법을 써야 하나.

이정희 대표[각주:9]는 북한 최고 지도자를 비판했을 때 늘 대북 관계가 악화됐다며 이 논평을 정당화한다[각주:10]. 이 대표가 이 나라나 미국의 관료와 우익들이 평소에는 적대시하다가 북한 정권과 우호 관계가 필요할 때는 찬사를 늘어놓는 이율배반을 지적하는 것은 옳다[각주:11].

하지만 한반도에서 각 국의 관계를 결정하는 가장 핵심 요인은 미국의 패권전략과 여기에서 파생되는 한반도 주변국들의 관계지, 남한 정당들의 태도가 아니다. 1994년 정상회담 추진에서 급작스런 전쟁위기로, 1998년 햇볕 정책 아래서 서해교전을, 2000년 냉각 국면에서 정상회담으로 등 이런 변화는 미국의 태도 변화가 주요 변수였고 남한 정권은 종속변수였다. 

또한 미국의 전쟁 협박 같은 게 아니라 진보적 비판을 이유로 북한 정권이 거칠게 나온다면 그것은 북한 정권이 나쁜 거지 우리 잘못이 아니다. 우리가 이명박이나 삼성 이건희 일가를 깐다고 그들이 권력을 동원해 억압하면, 그게 그들이 나쁘기 때문이지 우리 탓인가.

미국 제국주의나 한국의 냉전 우익의 색깔 공세와 진보진영의 북한 비판을 구분하지 않고 싸잡아 매카시즘으로 치부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진보도 북한 체제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쟁점이 된 <경향신문> 사설도 논점을 바꿔버렸다는 것이다. 사설에서 4분의 3 정도는 북한 비판과 북한 체제를 비판 못하는 민주노동당 논평의 약점을 비판하는 데 할애돼 있다. 여기까진 사실 문제 없다.  

그러나 사설은 글 말미에서 민주노동당이 “북한 체제를 비호하고, 나아가 상부로 간주한다는 비판에 부딪혀 분당이라는 아픔까지 겪은 바 있다”며 ‘종북’ 쟁점을 꺼낸 뒤,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북한 비판을 거부하는 것은 “냉전적 사고의 잔재”라고 말한다. 

냉전적 사고를 보통 남(南) 아니면 북(北)의 편에 서서 상대편을 죽이려는 사고 방식이라고 본다면, 경향의 사설이 민주노동당 지도부에게 냉전적 사고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들이 북한을 ‘상부로 간주하며’ 남의 체제와 대결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사실상 ‘민노당 종북론’인 것이다[각주:12]

이 때문에 민주노동당 지도부에게 입장을 바꿔달라는 경향의 호소는 마치 민주노동당 지도부에게 스스로 종북이 아님을 증명하라는 것처럼 돼 버렸다[각주:13]. 이정희 대표는 분명하게 이 점을 이유로 내세워 자신은 말하지 않을 권리를 사용하겠다고 답했다. 

이런 반응은 이해가 가는 면도 있지만, (경향 사설에 대한 판단과는 별개로) 모든 비판을 싸잡아 반공주의로 몰아가는 것은 과도한 면(역편향)이 있다고 본다. 국가 탄압으로 촉발된 논쟁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엔 아마 예상 못한 3대 세습이 자주파 내부에서도 혼란을 일으킨 게 과도한 대응의 주관적 배경이 아닌가 싶다.

유감스런 경향의 종북 공격

사실, 유럽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이 옛 소련의 정치적 국경수비대 구실을 한 역사가 있다. 남한의 자주파도 그런 경향이 없잖아 있고, 앞으로도 그럴 의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옛 공산당들이 각국 진보운동의 자체 구조와 문화, 맥락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한의 자주파도 남한 진보적 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정치적으로 생존 가능하므로 친북 성향이라 할지라도 보통은 남한 정치의 맥락을 더 중요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남한의 자주파가 한미fta에 반대하고,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해 대중행동 건설에 참여했을 때, 그것은 북한의 지령에 따른 것
(종북주의)이었나. 그렇다면, 비친북 좌파나 엔지오들은 북한의 지령에 따른 행동에 부화뇌동한 것인가.

이런 논리적 귀결 때문에 자주파를 일방적으로 종북주의로 내모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뱉기하는 것이다[각주:14]. 종북이란 용어가 뉴라이트에게서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북한 정권의 3대 세습을 비판하는 문제라면 누구나 한마디 거들 수 있고, 비판하기 뭣 하면 입을 다물면 된다[각주:15]. 진보진영 안에서 외교적 고려가 우선이냐, 가치가 우선이냐 등을 가지고 논쟁할 수 있다. 더 근본적으로 북한 사회가 사회주의인지, 정말 대안 사회의 자격이 있는지 토론해야 한다. 

그리고 종북론을 들먹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진보적 관점에서 북한 체제를 비판하고 자주파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 <레프트21>은 종북론에 의존하지 않고도 북한 3대 세습과 자주파의 무비판적 태도를 비판했다.(☞ 관련기사 ①이것이 사회주의인가 / ②당대표자회의 정치적 배경 / 다음 호에도 추가 기사가 실릴 예정이다[각주:16])

사실, 민주노동당 안의 자주파 지도부가 3대 세습을 찬양하는지, 혼란스러워 하는지, 비판하는지 개개인들의 정확한 속내는 아무도 모른다. 민주노동당 당원 전체는커녕 범엔엘 경향의 내부 의견 분포도 정확히는 모른다.[각주:17]

그런데 <경향신문>처럼 당 전체를 싸잡아 “종북이냐, 아니냐” 묻고 증명의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방식은
레드컴플렉스를 자극할 수도 있어 위험할 수 있다.[각주:18] 

내가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북한 체제와 그 옹호론을 강하게 비판하고, 북한 체제 비판을 무조건 매카시즘으로 몰아가는 자주파 일부의 대응 방식을 싫어하면서도, 경향발 종북 소동이 찜찜한 이유다.

남한에서 북한 비판은 차고 넘친다. 문제는 어떤 비판이냐다. 진짜 쟁점은 북한이 사회주의냐, 아니라면 무엇이냐, 진보의 대안 사회는 무엇이냐가 돼야 한다.




 

  1. 민주노동당 울산시당은 경향신문에 항의문을 보내고 보도를 시정하지 않으면 절독 운동을 하겠다고 밝혔다. 경향신문이 논조를 바꿀리 없으니 울산시당은 이미 절독을 선언함 셈이다. 결과는 우려스럽다. [본문으로]
  2. 이번 3차 당대표자회는 1966녀 제2차 회의 이후 44년 만에 처음 열리는 회의다. [본문으로]
  3. 2차대전 시기부터 1960년대 말까지는 서방까지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국가자본주의 형태가 큰 흐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국가자본주의는 1930년대 대공황이 자유시장이나 미약한 국가개입에 맡겨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게 드러났고, 세계대전으로 주요 국가들이 국가통제 전시경제로 가면서 실업과 과잉생산이 해서된 것 때문에 유행하게 됐다. 이 체제의 선구자는 1930년대 옛 소련과, 나찌 독일, 일본이었다. [본문으로]
  4. 통일뉴스 9월 29일치 기사 인용. ☞ 개정된 北노동당 규약 서문, '공산주의' 문구 빠져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1961 [본문으로]
  5. 이 말은 김정일이 그랬듯이, 김정은도 북한 지배계급 핵심 집단에게서 최고지도자로서 검증과 인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6. 심지어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마저 그랬다. 이들 일부는 네오콘이 되기도 했다. 반면교사로 삼아야할 교훈이다. [본문으로]
  7. 김정은은 아마 세습 선배인 <조선일보> 사주 일가를 보면 “방가방가” 하고 인사할지도 모른다. 조선일보 사주 방씨 일가는 가계도 상으론 무려 4대째 세습이다. 2대 방우영/일영 형제는 사실 방응모의 양손자다. 김1성 가문이 3대 세습에 성공하려면 ‘남조선’의 ‘3성’ 가문을 보고 배워야 한다. [본문으로]
  8. 그들이 친미 독재 국가인 이집트나 싱가포르의 정권 세습이나 사우디아라비아 왕정, 후세인 시절 이라크, 중국 등을 이런 문제로 비난하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 심지어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부시가 대권을 강탈하는 걸 전 세계인이 지켜봤는데, 뭐라 한마디 했던가. 한국 주류 우익들의 북한 비난은 남한에서 좌파의 신용을 떨어뜨리려는 매우 의도적인 위선이다. [본문으로]
  9. 이정희 대표가 다음 블로그에 쓴 “진보임을 인정받기 위해 한 마디만 해 보라고?- 경향신문 9월31일자 사설에 대해” 라는 글이 논쟁이 되는데, 찬반을 떠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 진실이 있다. 9월은 31일이 없다. 해당 사설은 10월 1일치다. (☞ http://blog.daum.net/jhleeco/7701325) [본문으로]
  10. 물론 이런 외교적 이유로 미국이나 한국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는 가치 판단을 담은 논평을 내지 않았다. 그 점에서 이정희 대표의 견해는 자주파적이라기보다는 햇볕정책의 자장 안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본문으로]
  11. 예를 들어,동아일보는 주석궁에 김일성의 보천보전투를 보도한 기사를 황금본으로 만들어 가져갔다. [본문으로]
  12. 암튼, 친북과 종북 두 용어는 쓰는 쪽에서나 받아들이는 쪽에서나 그 맥락이 다르다. [본문으로]
  13. 민주노동당의 자주파 지도부도 이 점을 민감하게 느껴 강하게 반발하는 듯하다. 경향신문의 후속 기사 제목도 자극적이다. [본문으로]
  14. 이 자기얼굴 침뱉기를 피하려면 자주파를 진보가 아닌 것으로 취급하면 된다. 종북론이나 반공주의를 수용하는 진보진영 일부가 자주파를 적대시하는 종파주의에 빠지는 것은 이런 논리의 귀결이라고 본다. [본문으로]
  15. 대한민국에서 북한 욕하기는 쉽다. 내가 진중권을 다룬 글에서 지적했듯 지배적 ‘상식’에 부합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국가보안법이 북한 체제를 명백히 비판하고 반대하는 좌파까지 처벌하는 것을 보면,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체제를 어떻게 비판하는가다. 북한을 비판할 때도 남한보다 못한 체제로 비판하는 것과 남한처럼 권력과 부가 독점 세습되는 똑같은 자본주의 계급사회라고 비판하는 것은 다르다. [본문으로]
  16. 박노자 교수도 10월 1일자 레디앙 칼럼을 통해 북한‘만’ 악마화하는 경향을 비판했다. 진보신당 조승수 대표 후보도 맨처음 북한만 비판하던 것과 달리 최근에는 세습 문제에서 남북 모두 비정상국가라는 논리로 바뀌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본다. 물론, 그럼 정상국가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은 남지만 말이다. [본문으로]
  17. 내부에 있을지도 모를 혼란과 외부적 부담을 모두 고려해 북한 체제를 비판하지 않겠다는 견해를 낸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18. 아니나다를까 후속 보도에서 경향은 북한 세습 비판을 이유로 민노당이 반발한다고 제목을 달았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종북 낙인찍기에 반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절독 선언 같은 건 완전 에러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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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우파 정권이 들어서고 그 충격으로 진보정당이 분열한 2008년, 촛불항쟁과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가 터졌다. 이 대사건들은 진보진영이 이념과 대안, 가치와 세력을 새로 구축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강하게 요구했다.

‘진보의 재구성’을 내세우며 창당한 진보신당도 이 과제에 더 몰두했다. 그 중간 평가가 내로라하는 진보 명사들의 대담과 글로 출판됐다.《진보의 재탄생》과《리얼진보》가 그것이다.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는 홍세화·진중권·변영주·김어준·우석훈 등이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이하 존칭 생략)와 진보의 미래를 놓고 대담한 기록이다.

노무현의 유고 《진보의 미래》에 답하는 형식으로 진보신당 상상연구소가 기획한 《리얼진보》는 김대중·노무현의 진보는 가짜라며, ‘진짜 진보’의 모습을 제시하려 한다. 강수돌·김상봉·정태인 등 지식인과 노회찬·장석준 등 진보신당 논객들의 글을 망라했다.

진보의 재구성에 관한 진보신당의 고민

‘진보의 재구성’을 내세운 진보신당은 촛불항쟁에선 수천여 명이 가입했고, 생태를 중요한 의제로 부각하는 등으로 진보의 의제와 외연을 확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비유하자면, 정치의식이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에 있으면서 민주당에 실망한 층을 목표대로 잘 수습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창당 2년이 지난 지금, ‘진보의 재구성’의 성과를 다시 재검토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새로운 층의 유입과 진보 좌파적 지향이 제대로 갈마들지 못해 좌충우돌의 진원지가 된다는 평가도 있다. 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반MB 단일화 압력이 커지면 (민주당과 급진좌파 사이에서) 모호한 진보신당의 입지는 스스로 찬 족쇄가 될 수 있다.

《진보의 재탄생》 대담자들은 대중과 만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김어준과 변영주는 세련되고 개방적인 진보로 변화할 것을, 홍세화는 “민중의 집” 같은 “일상의 정치”를 강화하자고 제안한다.

진중권은한국경제 자체를 한 단계 도약시킬 대안”을 요구한다.

《리얼진보》의 필자들은 상대적으로 “근본적 성찰과 고민”을 강조한다.
 

“진보와 개혁을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입장”(김상봉, 《리얼진보》)이기 때문이다.

더 크게는 2008년 위기로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가 파산했으므로, “긴 호흡”으로 과제를 모색하자는 것이다.

장석준은 “이윤 확보의 자유”에 “의문”을 던지자고 하고,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자본주의 극복 의지”를 강조한다. 한재각은 “환경·생태 분야를 다루면서 끊임없이 사회적 평등 같은 주제와 연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자유주의 정치와 선 긋기를 강조한다. “시민의 이익과 충돌하는 기업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도 “노동계를 통제하고 배제하는 것에서도 [노무현과 이명박] 두 정권은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노회찬은 이런 의견을 대체로 조합해 ‘국가가 개입하는 성장 전략’을 포함한 “서민중심형 복지동맹”(《리얼진보》)을 만들자고 한다. 이것이 “반MB 대안연대”다.

이를 위해선 “한나라당-민주당 체제를 극복”해야 하며, “보수와 진보의 양대 축으로 가려면 민주당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진보의 재탄생》)

진보와 개혁의 근본적 선 긋기를 강조하는 것은 반갑다. 얼핏 보아 급진적인 이런 ‘진보의 재구성’론이 결정적으로 장벽에 부딪히는 곳은 다름 아닌 “(행위) 주체” 문제다.

상상연구소 명의 글은 “노동운동의 힘이 중심에 버티지 않는 한” 전진이 불가능하다고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러나 상상연구소를 포함한 여러 필자들은 현재 조직 노동자운동을 불신한다.

이런 불신이 생긴 건 “복지를 통한 증세는 정규직 노동자 또한 …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할 수밖에 없는[데] … 민주노총은 이를 정면으로 반대”(김정진, 《리얼진보》) 하기 때문이다.

행위 주체

오건호의 말처럼, 조직 노동자들이 더 많은 복지 비용을 부담하는 게 “사회적 약자를 위해 자신의 요구를 집중하는 선도적 실천”(《리얼진보》)이라면, 이들이 말하는 노동운동의 ‘재구성’은 노동계급에게 계급투쟁 대신 ‘계급 양보’를 요구하는 셈이다.

“사회연대전략”은 더 열악한 집단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이 조직 노동자들의 양보라고 주장한다. 대기업과 친기업 정부에겐 직설적으로 요구하길 회피하는 것이다. 장석준의 “이상주의”도 이런 양보론의 냄새를 풍긴다.

여기서 이들이 노동운동 안에서 새 “주체”를 쉽게 못 찾는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조직된 행위주체인 노동운동을 불신하는 탓이다. 

그 뿌리에는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게 문제 아닐까. 사실이라면 진보신당의 명망가·선거 중심 활동은 진보신당 2년 평가에서 중요한 덕목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노회찬도 이렇게 털어놓는다.

“지금은 [진보정당 안에서도] 목표가 … 자신이 국회의원 한번 되는 게 거의 전부인 경우도 있고 … 집권하면 세상이 획기적으로 좋아지느냐, 거기에 대한 확신도 없는 거예요.”(《진보의 재탄생》)

노회찬은 홍세화와 한 대담에서 “진보신당의 좌표, 공식적인 노선은 여전히 사회주의적 경향에 있다고, 또 그래야 한다”(《진보의 재탄생》) 고 말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가치로 자본주의의 폐해와 맞서 싸우려면, “좋은 진보정당”(노회찬) 만으론 부족하다. 노동계급의 힘을 동원해 자본과 벌이는 계급투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주의 가치가 정치에 반영될 것 아닌가.

그러려면, 조직 노동자들이 양보가 아니라 투쟁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 … 선도적 실천”을 해야 한다.


두 책이 강조하는 ‘진보의 재구성’에선 바로 이것이 빠져 있다. 실제 사례를 들어 가며 환경 의제와 조직 노동운동의 만남 가능성을 중시한 한재각(
《리얼진보》)을 예외로 하면 말이다. 

시장의 민주적 통제?

그래서 비록 이 책들이 진보신당 2년을 솔직하게 돌아본다는 장점이 있고, 다른 보수 정치인들이 선거를 앞두고 내는 책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진지하다 할지라도 아쉬움이 남는 게 사실이다.

그 아쉬움의 실체는 여전히 진보와 중도개혁 사이에 존재하는 실천적 차이점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행위 주체(노동계급)의 문제는 대안(자본주의 극복)의 구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렇다.

예를 들면,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일자리를 창출할 때에도 이를 산업조직과 연결시키지 못”했고, 이는 “국가가 개입하는 성장동력을 통해서 일자리 문제까지 해결하려는 전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것(진중권, 
《진보의 재탄생》 )은 다소 당황스럽다.

좌파가 자유주의 우파에게
성장전략”이 없다고 비판하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밥 먹여 주는 진보'의 재구성일까.

노동계급의 힘을 동원하는 걸 꺼리니 자본주의를 [자체든 그 폐혜든] 극복하려는 전략도 모호해 지는 것이다.

노회찬은 홍기빈과 대담에서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말하면서도 반(反)시장, 반(反)기업은 아니라고 말한다. 시장을 최소화하는 과거의 사회주의 정책에 대해서는 이미 검증이 다 됐다고 보기 때문이다.(《진보의 재탄생》)

물론 노회찬이 과거의 사회주의라 부른 것들, 옛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의 관료적 국가자본주의가 실패하고 검증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홍기빈이 대담에서 지적하듯이 온건한 시장 규제 정책으론 자본주의의 횡포를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집권 경험으로 이미 검증됐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을 공개적으로 짓밟는 기업이 한 나라의 최고 기업(기업인)으로 대접받는 사회에서 [진보] 정부가 주류 엘리트들에게서 반(反)기업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고 진보적 사회 정의를 구현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선 진보신당의 강령 전문(前文)이 오히려 현실을 정확히 보는 듯하다.

자본은 암세포가 숙주를 파괴하고 자기도 소멸하듯 총체적 파국을 향해 질주한다. 우리는 이 위기를 오직 자본의 지배 자체를 극복함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 인류가 이 문제를 새로운 기술이나 시장 개척 또는 군사력으로 해결하려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 인류 문명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전쟁과 죽음밖에 없다.”(진보신당 강령 전문 2, 강조는 기자의 것)

 
세계자본주의 핵심부에서 시작한 경제 위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좌파의 재구성은 자본주의의 우선 순위에 도전할 대안과 전략, 세력을 구성해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러려면,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려는 '현실주의'가 아니라, 현실을 바꾸려고 그 현실의 조건을 직시하는 '현실주의'가 필요하다.

《진보의 재탄생》과《리얼진보》에서 때론 급진적이기도 한 문제의식이 대안과 행위 주체에서 부딪히는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은 후자의 '현실주의'를 회피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 이 서평은 <레프트21> 29호에 실린 기사(아래 링크)에 추가로 내용을 덧붙인 글입니다.

[서평:《진보의 재탄생》, 《리얼진보》] 진보의 재구성에 관한 진보신당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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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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